[학술논문] 북한지역 사찰의 불교사적 의의
본 논문은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북한지역의 사찰의 역사적 중요성을 다룬 연구이다. 북한지역내 고구려 사찰은 평양천도 이후의 것이 대부분인데 고구려 건국자 동명성왕과 관련된 광법사, 영명사, 중흥사, 정릉사 등의 사찰이 중요시 되었다. 신라하대 수미산문의 해주 광조사는 최북단 9산 선문 가운데 하나였으며, 선종의 북한지역의 확대 포교였다. 북한지역내 발해지역의 개심사 등의 사찰은 남북국시대의 불교도량이라고 하겠다. 고려시대 국도 개경의 중요사찰은 태조가 창건한 법왕사․왕륜사 등의 10대 사찰이다. 역대 왕실에서 운용했던 봉은사․불일사 등 진전사원 그리고 불교계가 운용했던 고려시대 주요종파의 본산 사찰도 중요하다. 즉, 고려불교의 12종파의 본산 산문중심 불교가 개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더불어 서경인...
[학술논문] 英祖朝 東村派의 交遊樣相과 交遊詩 -吳瑗· 南有容· 李天輔· 黃景源을 중심으로-
...1728년 봄, 남유상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임은 한때 활기를 잃게 된다. 1732년이 되어 황경원이 모임에 가담하면서 吳瑗·南有容·李天輔·黃景源을 핵심 구성원으로 한 이 모임은 1740년, 오원이 죽을 때까지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 시기에 모임의 핵심 구성원들은 여러 차례 四郡을 함께 유람하기도 하고 北漢山, 貞陵, 冠岳山 등 한양의 승경지를 찾아다니며 文酒會를 가졌다. 吳瑗·南有容·李天輔 세 사람은 특히 자주 東亭에 모여 시를 지었으며 그때 지은 시를 시집으로 엮기도 하고 唐 이전의 시를 선발하여 시선집을 엮기도 했다. 1740년, 오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임은 침체기에 접어든다. 오원은 이 그룹의 중심 인물이었고 그의 종암 동정은 이...
[학술논문] 근대 사진으로 본 조선 초기 왕릉의 원형
...특히 함경도 소재의 팔릉은 태조의 선조가 안장된 능으로 북한에 위치하였고, 추존 왕의 능인 까닭에 조선왕릉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촬영한 함경도 팔릉의 사진을 통하여 조선 초기에 조성된 덕릉․안릉은 고려 후기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릉․정릉과 유사성을 갖는다고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팔릉 중의 하나인 정릉․화릉도 조선 초기 능의 특징을 지니며, 후기까지 꾸준히 관리되어왔다. 태조의 비 신덕왕후의 정릉은 현재 정자각 옆에 수라간이 없고, 석물 부재가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근대 사진을 통하여 수라간의 위치와 모습을 파악하였고, 석물 부재를 확인하였다. 세조와 정희왕후 광릉은 현재 홍살문과 정자각을 잇는 향로가 없는 모습이지만, 20세기 초 사진으로 향로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학술논문] 서울 정릉리 주민들의 6·25전쟁 경험-김성칠의 일기자료 『역사 앞에서』를 중심으로
...기만이나 공포감의 조성과 함께 식량문제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식량위기는 정릉리 주민사회의 민심이 이반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다섯째, 수복은 정릉리 주민사회에 새로운 이념대립 구조를 만들었다. 잔류한 주민들은 잠재적 ‘빨갱이’로 취급되었으며, 정부와 함께 피난을 떠났다 돌아온 소수의 도강파 주민들은 마을 내의 가장 도덕적인 집단이 되었다. 정릉리 주민들의 전쟁 경험은 한국전쟁 시기 사회변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내용들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 막연하게 이야기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전쟁이 정릉리의 주민구성을 변화시킨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전쟁은 마을을 對共투쟁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셋째, 전쟁 경험은 정릉리 주민들에게 ‘나라’에 대해 극도의 냉소주의와 피해의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