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1954년 제네바정치회담과 외국군 철수 의제
...15개국(남아공 제외), 북한과 중국·소련 등 총 19개국이 참가하였다. 회담의 의제는 한반도 통일방안이었고, 구체적인 논의과정에서 통일방안의 조건으로서 외국군 철수 문제와 유엔의 지위 문제 등이 쟁점이 되었다. 회담에서 양측은 모두 선거에 의한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선거방법과 선거 감시문제에서 차이를 보였고, 외국군 철수 문제에서는 유엔군 측이 침략군인 중국군의 우선 철수를 주장한 반면, 공산군 측은 모든 외국군대의 즉각적인 동시 철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유엔군 측은 한반도 통일 전에 유엔군을 철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유엔참전국 내부에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유엔군 측 주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어렵게 되고, 공산군 측이 유엔의 지위 문제를 적극 제기하자 미국은...
[학술논문] 1958년, 위기의 북한과 중국의 선택: 북한 주둔 중국군 철수의 원인과 배경
북한에 주둔 중이던 중국군이 철수한 1958년부터 북·중간 안보조약이 체결되는 1961년까지 약 3년의 북한 안보공백기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불균형한 안보상황을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에서 왜 중국은 철군을 감행했고, 북한은 이에 동의했던 것일까? 1958년을 전후로 중국이 처한 국내외적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철군의 주요한 원인은 중국 측에 있었다. 안보적 차원에서는 타이완해협 위기로 촉발된 중국의 불안정한 안보환경이 하나의 원인이었으며, 경제적 차원에서는 북한 주둔의 경제적 부담과 대약진운동 등 국내 경제개발을 위한 국력집중의 필요성 또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한편, 북한이 안보적 위기감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철수를 용인할 수 있었던 것은 주둔과 철군 사이에 안보적 효용 차이가 거의...
[학술논문] 제2차 서울 수복과 국군 제15연대의 전투
...진출하였다. 당시 유엔군사령부는 불필요한 손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실익이 없는 서울 탈환을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았다. 제15연대의 장병들은 이 시기에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며 전투력을 보충하였다. 중국군은 유엔군의 진격을 기다려 제4차 공세를 감행하였다. 국군 제8사단이 돌출부를 형성하자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하여 역습을 감행하였으며 많은 피해를 입혔다. 중국군의 제4차 공세가 끝난 뒤 유엔군은 킬러작전을 통해 전선을 정리하고 리퍼작전을 통해 중국군과 북한군을 분리하였다. 서울 수복은 리퍼작전에 의해 유엔군이 서울 동측방에서 한강을 도하하고 서울 방향으로 진격함으로써 그 길이 열렸다. 국군 제15연대는 신속히 한강을 도하하고 공산군이 철수한 서울을 다시점령함으로써 서울을 탈환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