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관광]
...경험과 함께 시작됐다. 현재 서울의 공간적 구획과 길의 편재에 남은 흔적이 바로 그런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근대는 시공간을 씨줄과 날줄로 격자화하고 양화(量化)한다. 그러한 근대의 상징인 철로와 도로는 최대한의 효율성을 따라 구획된다. 그러나 서울에 기찻길과 찻길이 놓이는 과정은 모두 제국주의의 팽창과 침탈 과정에 연결돼 있었으며 그 길들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 등의 전쟁 수행을 위한 후방의 병참기지로서 서울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길이 놓이는 자리에 살던 사람들은 삶의 터전에서 내쫓기고 길을 놓기 위한 노동에 강제로 동원됐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의 삶을 모던적으로 변형시켰다.
--- p.15
열네...
[정치/군사]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주민들을 그들의 군영으로 불러 전깃불 아래서 당구치는 모습도 보여주고 일요일(Sunday: 산다이)에는 함께 춤을 추는 등 다양한 놀이를 했다고 한다. ‘산다이’는 그들에게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썩 달갑지 않은 놀이문화이다.
1885년, 이때 조선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을 박탈하여 마음껏 그들의 야욕을 채우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마침내 조선을 병합하는 단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이 당시 세계정세는 어떻게 흐르고 있었는가. 러시아는 1856년 영국과의 크림전쟁에서 패배하여 지중해 진출이 봉쇄되었고, 영국이 1880년 아프카니스탄을...
[정치/군사]
한국은 청 제국 시기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의 일부였는가?
왕위안충이 던지는 새로운 질문에 대해 깊이 읽고, 토론하며
한중 관계와 한반도의 미래를 성찰하자
1894년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세계의 오랜 중국적 질서의 와해와 근대 국가를 향한 갈림길이었다. 이듬해 청일 사이에 체결된「시모노세키」조약 1조는 “중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주를 확실히 인정한다.”라고 명시했다. 조선이 그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것인가? 비록 생존을 위해 중국에‘사대’를 했을지는 몰라도,‘중국의 일부’였다는 조약의 첫 문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정치/군사]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
북일 교섭 30년의 평행선을 돌아보다
일본은 1945년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청일전쟁 이후 50여 년에 이르는 전쟁 국가의 역사를 끝냈다. 이후 일본은 연합국과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조인했고, 이후 여러 나라들과 조약 또는 협정 등을 통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1952년 타이완, 1954년 미얀마, 1956년 소련, 1965년 대한민국, 그리고 1972년 중국, 1973년 북베트남과 국교를 수립했다. 하지만 일본은 북한과는 국교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과 북한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1959년 재일 조선인 귀국이 대표적이다. 이 사업은 1962년까지 계속돼 총 9만 명의 재일 조선인이 북한으로 이주하게...
[학위논문] 지정학으로 본 러시아제국의 對한반도정책(1884-1904) : 팽창원인과 실패과정을 중심으로
...정책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었다.
넷째, 러시아의 극동과 한반도 정책의 목표는 거점의 확보를 중시한 해양국가와는 달리극동지역에 대해 영토적 지배를 목적으로 한 나타난 것이었다. 이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인식과 환경이 반영된 것으로 러시아제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제국의 완성을 위한 팽창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한반도 지배에 대한 의도는 청일전쟁이후 아관파천을 기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1900년 의화단 사건, 1903년 용암포 점령, 일본의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의 거부 등을 통해 명확해졌다. 러시아는 해양세력과 달리 영토의 팽창을 통해 극동지역의 영토를 보호하고 안정화시키려는 의지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해양진출을 위해 극동의 만주와 한반도의...
[학술논문] 한국전쟁을 보는 두가지 시선: 냉전시대 동·서독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한국전쟁 관련 내용 분석
...관련 동독 역사교과서의 서술은 1952년부터 1989년까지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한국전쟁은 미국과 남한 괴뢰정부가 계획한 것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과 남한 정부가 보였던 여러 가지 정황 증거들에 근거하고 있다. 서독 역사교과서의 근현대사 관련 서술에서 한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청일전쟁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출판 시기를 막론하고 서독 역사교과서는 한국에 관련된 내용 중에서 ‘한국전쟁(Koreakrieg)’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석 대상인 1951년부터 2002년까지 출간된 187권의 서독 역사교과서는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따라서 전쟁의 책임은 북한에게 있다는 입장이다. 역사교과서는...
[학술논문] 청일전쟁으로 가는 길: 고종 정권과 대원군 세력의 권력투쟁; 그리고 대외관계의 변화
본 논문은 고종 친정 이후 청일전쟁 시기까지 조선 국내정치와 대외관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본 논문은 고종 정권과 대원군 세력은 상호 권력투쟁 과정에서 우월한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청이나 일본, 그리고 러시아와 같은 외부 행위자와의 제휴를 모색하였으며, 양측의 대립은 결국 청일전쟁을 촉발시키는 근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은 ‘내적’에 대응하기 위해 전방위 균형전략을 구사하는 정치 권력의 일반 행태를 이론적으로 논의하고 이에 기반해 임오군란, 조러밀약 사건, 그리고 청일전쟁기 고종 정권과 대원군 세력의 대립구도를 분석한다. 고종 정권은 애초 전향적 개화정책을 통해 청으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보하려 했음에도 대원군 세력과 연계된 임오군란이나 동학군에 의한 정치적 위기상황에서는 오히려 청에...
[학술논문] [한국 근대Ⅰ] 성찰, 화해, 포용의 동아시아사를 위해
Korea marked the anniversary of major historical events developed after the opening of a port with the government-designated Korean history textbook issue in the year of 2014 and 2015. It would be confirmed that there are microhistorical studies tending to verify agony, indignity and life of people who experienced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Russo-Japanese War.
Even in issues focusing 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