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러-우 전쟁 북한군 참전의 법적 검토: 포로의 처우와 국가책임을 중심으로
...포로 지위가 부여된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생포된 북한군 포로심문 과정이 언론과 인터넷에 여과 없이 노출되면서 포로와 그 가족들의 실질적인 박해 또는 인권침해가 예상된다. 북한군 포로의 동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포로라는 신분으로 인해 진정한 동의인지도 문제가 문제될 수 있으며 설령 진정한 동의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포로심문 과정의 언론 노출 그 자체가 제 3협약 제13조의 대중의 호기심에 노출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규정에 위반이 될 수 있다는 ICRC 주석서 의견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출로 포로와 포로의 가족이 불이익한 처우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억류국의 세심한 주의 역시 필요하다. 또한, 북한군 포로의 송환과 관련하여 한국전쟁에서부터 확립된 국제실행은 포로의...
[학술논문] アイゼンハワーの米韓相互防衛条約への承認過程と反共捕虜の釈放
...を明らかにしたものである。朝鮮半島からの中国軍の撤退、反共捕虜の処遇をめぐる諸問題、それから政治会議のあり方を中心とした休戦条件と並行して、米韓相互防衛条約の締結を主張していた韓国に対して、米国政府は、韓国が同条約の締結を切実に願っていると判断し、1953年6月7日に休戦協力への見返りとして同条約の締結に向けた交渉を開始する意向があることを李承晩に伝えた。ところが、李承晩としては、米国との相互防衛条約の締結だけでなく、他の休戦協力への条件も譲れないものであって、米国から同条約に向けた交渉開始の提案がなされた際も、その強硬な姿勢を一向も軟化させようとしなかった。 一方、板門店においては、李承晩のからの強い反対にも関わらず、大詰めの協議が行われていた。会談の進展振りに危機感を覚えた李承晩は、1953年6月18日夜明け、北朝鮮軍の反共捕虜を電撃的に釈放するに至った。韓国軍の国連軍司令部の指揮から...
[학위논문] 북한 출신 북한 이탈주민 전문상담사의 직무 경험
...향상 탈북의 동질감으로 내담자와 심리적 공감대 형성 상담장면에서의 심리적 외상 재경험 북한 이탈주민 내담자에 대한 실질적 도움제공 남한 생활 자립자활을 위한 사회적 연대 구축 상담 이외의 다양한 업무로 인한 소진 상담사 처우에 대한 불만족 내담자와 적절한 경계유지 곤란 내담자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으로 인한 부담 상담역량 강화를 위한 다중역할의 고충 내담자의 자주적인 삶을 위한 일치성 노력 등의 심리사회적 특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여자들은 내담자와의 탈북경험 공유로 형성된 강한 라포로 심리상담과 함께 다양한 삶의 영역에 걸쳐 복지 차원의 생활 지원을 연계하며 이들을 한층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었다. 이들은 남북한 문화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돕고 남한 생활에 도움이 될 사회기술을 익혀 보다 빨리 남한...
[학술논문] 한국전쟁기 공산군의 유엔군 포로 관리와 성격
...軍事史적 관점에서 한국전쟁기 공산군의 유엔군 포로 관리에 대해 미군 포로를 중심으로 하여 고찰 한 것이다. 북한군은 남침을 개시하기 직전까지 포로 정책을 수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국군과 스미스 특수부대는 북한군과의 조우로 전쟁포로가 되어 다수가 사살되거나 북한군의 최후방인 압록강을 향한 가혹한 행군을 감수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포로들은 영양 부족과 체력 저하로 인해 다수가 사망하였다. 이것은 중공군 개입 후 1951년 3월경 포로 관리 책임이 중공군으로 이전된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포로 송환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단지 정전협정의 기조에 따라 처우의 개선과 퇴보는 반복되었다. 공산군의 포로 관리를 재구성하기에 앞서, 본고의 Ⅱ장에서는 공산 측이 발표한 포로 현황의 신뢰성 여부를 진단한다. 이 장에서는...
[학술논문] 전쟁포로의 또 다른 경계 — 한국전쟁기 빨치산 포로수용소 연구
...등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본 논문은 한국전쟁기 ‘빨치산 포로’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는 차이가 있다. 그들이 전쟁포로로서 어떤 처우를 받고, 어떻게 관리됐으며, 이후 포로처리는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빨치산 포로수용소의 실태 분석을 통해 이를 면밀하게 살피고자 했다. 본 논문은 구술 면담자의 증언을 중요하게 다뤘다. 이를 통해 빨치산 포로들의 처우, 감찰, 신문 과정 등을 들여다본 것은 물론 광주중앙포로수용소의 시설도까지 복원이 가능했다. 또 미군 보고서 등의 분석을 통해 광주중앙포로수용소 현황 및 실태 등을 세밀하게 파악했다. 1952년 광주중앙포로수용소는 한 차례 명칭이 변경됐다. ‘포로’라는 이름을 빼 ‘광주중앙수용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