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졸업하면서부터였다. 당시는 경호원과 당중앙위원회 지도원(부원)이 서기로 동행했다. 촬영소에는 사무실도 있었고 간소한 침실도 꾸렸다. 그때부터 예술영화촬영소에는 부비서 직책만 있었다. 당비서는 사실상 김정일인 셈이다. 모든 영화사업은 김정일의 지도와 비준을 받아야 했다.
● 김현숙 우인희 성혜림 세 여인의 배우생활의 연도를 돌아보자.
김현숙은 1953년 6·25전쟁이 끝나면서 영화촬영소 현지에서 입문한 중학교 졸업생이었다. 집이 근방이라 촬영소 주변에는 늘 아이들이 서성였다. 그들 중 눈에 짚이는 처녀가 17세 김현숙이었다. 영화인들이 그를 불러 몇 동작을 찍어 돌려보니 배우로 품이 있었다. 특히 앞으로 가면서 뒤로 돌아서 웃어보는 모습이 귀엽고 아름다웠다...
[통일/남북관계]
“6·25전쟁 75주년 맞아 숨어 있던 참전용사들의
생생한 증언집 『호국영웅들의 이야기』 출간”
“잊혀진 영웅들을 기억하고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20여 명 참전용사의 실명 증언 수록,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아 출간된 『호국영웅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 쉽게 “과거”라 부르고 지나쳐왔던 전쟁의 한복판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은 단순한 군사 기록이 아니다. 이름 없는 병사, 전투의 최전선에 섰던 노병, 이제는 고인이 된 이들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통해 전쟁의 진실을 들려주는...
[사회/문화]
...“6ㆍ25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지 70여 년이 지났다. 두 세대가 훨씬 더 지난 시간이다. 전쟁 트라우마는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흐려지는 면이 있지만 그대로 전수되거나 더 깊어지는 면도 있다. 대형 참사나 이번 내란 사태 같은 일을 겪을 때다. 전쟁 당시 가해자들이 피해자 유족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발언을 할 때, 겪지도 않은 젊은이들이 그 사태를 악의적으로 떠벌일 때도 더 깊어진다. 이런 말을 밥 먹듯 하는 극우들이 준동할 때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다. 이제껏 봐왔듯이 이런 트라우마가 살아 있으면 민주화는 한없이 더디게 된다. 지역감정도 사라지지 않는다. 남북 화해는 언감생심이다. 그러니 이 트라우마의 치유 없이 평화와 통일을 기대하기 어렵다.”
올해는 6.25전쟁이...
[사회/문화]
...책의 내용을Ⅰ부로 구성하고, Ⅱ부에 1960년대 대표 단편소설을 함께 묶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천리마 운동 시기’를 다룬 1960년대 대표 작품들 자체로도 11편 정도를 선정하였기 때문에 분량과 더불어 내용 면에서 분권하여 출간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를 별도의 책으로 구분하여 북한의 단편소설을 더욱 많이 소개하는 쪽으로 마무리가 되어 지금의 형태로 독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2024년에 돌아보는 한국전쟁(1950~1953) 이후 1950년대 한반도에서의 삶이란 무엇인가? 남한에서도 ‘전후(戰後)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1950년대 내내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상흔과 후유증은...
[정치/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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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_ 협상이라는 전쟁의 또다른 형식
1951년 5월 16일 트루먼은 한국전쟁을 종결하자는 제안을 승인했다. 전례 없는 규모의 5차 전역, 한반도에 투입된 병력은 어느덧 100만 명을 넘어섰고, 이제 곧 세계 전쟁사상 가장 지난하고, 가장 극적이며, 가장 치열했던 심리전인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연출될 일만 남았다. 2년간 벌어진 협상 기간 동안 쌍방의 방어선에는 약 20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집중 배치되었다. 저자의 진술에 따르면, 정전협정의 각 조항이 협의되거나 심지어 글자 하나에 대한 논쟁까지 그 모든 결과가 전 세계에 순간적인 절망과 희망을 안겨다주었다.
1951년 7월 10일,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
[학술논문] 한국전쟁 시기 북·중 갈등과 소련의 역할
이 연구의 목적은 한국전쟁 시기 북한과 중국의 갈등관계와 이들 사이에서 소련의 중재적 역할을 밝히는 데 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서명하기까지, 북한과 중국이 항상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여온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동안 역사적 사실을 다룰 수 있는 자료들의 접근성의 한계로 인해, 한국전쟁 시기 북·중관계의 갈등적 측면은 제한적이고 표면적으로 다루어졌다. 북한과 중국은 1950년 10월 중국의 참전 이후 조중연합사령부의 설립과 지휘권 문제, 남진과 휴식, 정전협정 협상 과정에서 갈등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이 모든 과정에서 중재적 역할을 맡았다. 다만 북한과 중국의 갈등 해결은 서로의 이해와 양보를 수반한 것이 아닌, 소련이 북한을 설득해 중국의 주장이 관철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중국이...
[학술논문] 북한군의 표창제도 형성 연구
북한은 1947년 4월에 ‘표창장’을 제정한 이래 6⋅25전쟁 때까지 북한군에 표창제도를 도입하고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1948년 10월 12일에는 처음으로 국기훈장이 제정되었고 1949년 6월 13일에는 군공메달이 도입되었다. 북한군의 표창제도는 6⋅25전쟁 초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1950년 6월 30일 영웅칭호를 새로 제정했고 7월 1-13일에 전사의 영예훈장, 자유독립훈장, 리순신훈장을 새로 도입했다. 전쟁 전에 도입한 국기훈장과 군공메달의 수훈자도 개전 직후부터 급격히 증가했다. 북한은 6⋅25전쟁 동안 북한인 718,712명과 중국군 450,686명 등 총 1,169,398명에게 표창을 수여했다. 가장 많이 수여된 표창은...
[학술논문] 중국의 ‘抗美援朝’ 전쟁과 周恩來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국은 ‘조선전쟁’이라고 불렀으나, 10월 중국인민지원군(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이 참전하면서 ‘抗美援朝戰爭’으로 명명하였다. 당시 ‘抗美’는 ‘保家衛國’이라는 애국주의 구호이고, ‘援朝’는 위험에 처한 형제나라 ‘조선’을 도와준다는 국제주의 구호이다. 그런데 항미원조전쟁은 조국 방어와 조선을 돕는 전쟁을 넘어, ‘인민해방군의 현대화 건설, 국내경제건설, 대중동원, 애국주의 정신, 중국의 대국지위’ 등 정치․외교․군사적으로 중요한 주제와 관련되며, 사회 각 방면의 인적․물적․사상적...
[학술논문] 한⋅중 6.25전쟁 전선소설에 드러난 ‘애정(愛情)의 정치적 서사’ 비교연구
한국전쟁은 당시 한중 양국의 문단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한국에서종군작가단의 결성과 중국의 ‘입조’(북한에 들어감) 작가단의 형성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양국의 종군작가단은 전쟁의 승리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는 도구로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이른바 전쟁기의 문학은 강한 정치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선소설에서 인간의 욕망을 대표하는 애정이라는 감정이 정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고 전선소설 속에 있는 문학의 자율성을 탐지하는 것이본 논문의 목적이다. 본고에서 소개한 애정과 정치의 관계는 주로 ‘개인적 애정과 조국애의 양보’ 관계와 ‘개인적 애정과 조국애의 합일적 관계’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해당 작품으로는 정비석의...
[학술논문] 지리산권 빨치산의 형성과 활동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6․25전쟁 이후 빨치산 활동은 북한의 전쟁동원정책에 규정되어 전황의 추이에 따라 급하게 전술적 변화를 요구받았다. 1949년 하반기 공세도 그러했지만, 북한 전쟁지도부의 전쟁 정책의 목표와 공식 입장, 그리고 빨치산들의 객관적 상황과 실질적으로 가능했던 내용 사이의 괴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전쟁 이전과 이후 빨치산들이 겪은 문제는 구조적으로 유사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주의운동 세력의 정치적 실패와 기반 상실로 이어졌다. ‘남부군’은 1951년 동계토벌 이후 사단 편제를 해체하고, 1953년 하반기 이후로는 조직적 활동이 소멸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구체적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연구와 서술이 필요하다. 전반적으로 한국전쟁 전후의 빨치산 활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