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군사]
... 북한은 수도권 전 지역으로 미사일 공격을 확대할 것이다. 이때 중국은 타이완 침공을 시작한다. 응전을 위해 미국은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타이완으로 보내고 결국 타이완 내륙에서 시가전이 벌어진다. 미국의 요청으로 일본, 캐나다, 호주, 영국, NATO가 참전을 선언하면 중국은 러시아에 참전을 요청한다. 이 상황이 우리가 목도하게 될 양안 전쟁에서 한반도 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 시나리오다.
[정치/군사]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조인했고, 이후 여러 나라들과 조약 또는 협정 등을 통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1952년 타이완, 1954년 미얀마, 1956년 소련, 1965년 대한민국, 그리고 1972년 중국, 1973년 북베트남과 국교를 수립했다. 하지만 일본은 북한과는 국교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과 북한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1959년 재일 조선인 귀국이 대표적이다. 이 사업은 1962년까지 계속돼 총 9만 명의 재일 조선인이 북한으로 이주하게 됐다. 하지만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일본과 한국의 국교가 열리면서, 북일 관계는 다시 긴장 관계에 놓인다. 그러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에는 북일 사이에 무역이 시작되기도 했다. 한편...
[정치/군사]
.../> 왕수쩡의 『한국전쟁』에서 눈여겨볼 지점 중 하나는 각국이 구사하는 전술·전략의 유래와 전개 양상이다. 맥아더는 한국전쟁 이전 태평양 여러 지역의 여러 섬에서 미군의 상륙작전을 지휘한 경험이 있었으며, 이는 이른바 ‘개구리 뜀뛰기 전법’이라 불렸다. 이 전법은 방어가 취약하거나 아예 방어지가 되지 않던 상대편 군사의 후방 요충지에 기동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착상은 이 당시 경험에서 유래했다. 소위 ‘치고 빠지기’를 시종일관 전개하면서 적군의 혼을 빼놓는 펑더화이의 유인 전술은 전통적인 중국식 전투법이자 나름 비장의 무기였다. 일찍이 이 전술을 경험한 것은 일본군과 타이완에 있는 국민당 군대뿐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한국군과...
[학술논문] 미・중 화해와 한국-타이완 관계 : 외교정책 결정자들의 인식과 대응
... 인해 공산권 국가와 교류에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 따라서 서로의 이해관계는 없지만, 국제사회의 주변부를 맴돌게 된 한국과 타이완은 양국의 이해 관계에 따라 협력을 유지했다. 1970년대 한국과 타이완은 타이완의 국제적 고립 속에서도 여전히 우호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두 국가는 서로 다른 목표로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보는 신뢰 없는 쇼윈도 동맹을 유지했다. 한국과 타이완은 1970년 서로의 한계를 인식과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필요한 만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가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이 남북한 유엔동시 가입과 사회주의권 붕괴와 함께 찾아온 냉전체제의 붕괴였다.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실질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면서 타이완과의 협력관계를 청산했다.
[학술논문] 1958년, 위기의 북한과 중국의 선택: 북한 주둔 중국군 철수의 원인과 배경
...이에 동의했던 것일까? 1958년을 전후로 중국이 처한 국내외적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철군의 주요한 원인은 중국 측에 있었다. 안보적 차원에서는 타이완해협 위기로 촉발된 중국의 불안정한 안보환경이 하나의 원인이었으며, 경제적 차원에서는 북한 주둔의 경제적 부담과 대약진운동 등 국내 경제개발을 위한 국력집중의 필요성 또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한편, 북한이 안보적 위기감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철수를 용인할 수 있었던 것은 주둔과 철군 사이에 안보적 효용 차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북중 간의 지리적 인접성, 한국전쟁을 거치며 발전된 중국의 군사적 능력과 양국 간 신뢰관계는 철군이 갖는 불리함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심각한 안보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북한은 북한 주둔...
[학술논문] 시진핑 집권 2기 중국의 대북정책:선택적 균형전략의 최적화와 공세적 한반도 영향력 경쟁
...한중수교 이후 중국은 북미관계 개선 필요성을 강조해왔으나 남북, 북미관계가 예상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특히 남⋅북⋅미가 중국의 참여를 달가워하지 않자 중국의 태도가매우 공세적으로 변화했다. 특히 장기간의 냉각기를 일시에 해소한 세 차례의 북중 정상회담, 중국 최고 지도부의 평양 ‘9.9절’ 행사 참여 등은 분명히 중국의 계산된 전략적 행동이다. 이처럼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지속 가능한 평화를 원하고 이를 지원할 의지가 있지만 그 전제는 자신들의 한반도 영향력이 확대 유지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자신들의 참여가 배제되고 기존의 영향력마저 축소된다면 조력자가 아닌 방해자로 변신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국이 통상, 남중국해 해양 주권, 타이완, 티베트, 인권문제에...
[학술논문] 중국과 한국의 평화 통일 접근법 비교 연구
...중국은 타이완과의 평화 통일을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중국으로 이주를 희망하는 타이완 주민들에게 중국의 신분증 교부를 제안하는 등 과거 보다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것들이다. 이제까지 외부에서는 중국은 무력 통일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는 이와 달리 평화 통일도 꾸준히 추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거의 유사하게 분단되었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분단 상태에 놓여있지만 이를 해소하기 위한 통일 노력은 최근들어 조금 다른 접근법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보다 자주적이고 평화 통일적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여전히 안보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하면서 북한과 대결 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결국 한국은 분단의...
[학술논문] 중국의 한국전쟁 인식, 서술, 활용
중국은 한국전쟁을 반(反)침략 전쟁, 정의로운 전쟁, 승리한 전쟁으로 정의한다. 한국전쟁에 관한 중국 정부의 서술은 하나의 정전(正典, Canon)으로 규정되어 중국에서 편찬되는 역사서적, 언론, 교육기관의 교재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북한을 도와 미국과 대적하여 싸웠다는 ‘항미원조전쟁’의 서사가 만들어졌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조선내전’과 ‘항미원조전쟁’으로 구분하여 인식한다. 중국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한반도 내부에서 발생한 내전(內戰)으로 시작되었지만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국제전(國際戰)으로 전쟁의 성격이 변질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이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한 것은 신중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