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냉전체제 형성기(1945~1948) 中華民國의 한국인식 - 국민당 언론의 한국 기사를 중심으로 -
본 연구는 종전이후 중화민국의 주요 신문인 『대공보』‧『신보』‧『중앙일보』의 한국관련 보도를 통해 냉전초기 한‧중 관계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전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미·소 주도의 냉전체제로 급속히 재편되었다. 전승국인 중국은 국공내전에 휩싸여 대외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고, 동아시아 질서재편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다. 전후 한국문제처리에서 중국은 미·소의 주도로 진행된 국제논의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단지 역사적 현실적으로 긴밀한 연대와 외교적 후견역할을 통한 도의적 책임론을 내세워 한국문제에 적극적으로 의사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자국의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미국의 후원과 협력에 의해 제한적 역할만 가능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이 줄곧 주장해온 4개국 협의에 의한 한국독립과 미·소 군대의 철수는...
[학술논문] 안중근연구의 현황과 쟁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안중근의거에 대한 인식’은 크게 국내와 국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내의 인식은 한국 천주교 인식과 비천주교의 인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윤선자 등의 연구에서 보듯이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라는 결론이다. 이에 대해 신운용은 천주교 내에도 안중근인식의 다양성을 엿볼 있다고 주장하였다. 후자는 임수경․윤효정 등이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안중근인식을 분석하였고, 신운용은 황실․정부․재야 학생세력․부일세력 등의 안중근인식을 살펴보았다. 해외한인의 안중근인식 연구는 한상권과 신운용의 논문이 주목된다. 그리고 제삼국의 안중근에 대한 인식 중 중국인의 경우는 한시준․김춘선․손염홍․서용 등의 연구가 주목된다. 러시아의 안중근인식에 대한 연구는 박 보리스․박 벨라․따찌야나 심비르체바...
[학술논문] Rezeption und Umformung des westlichen Nationsbegriffes in Korea
...형제애를 강조하는 은유로 빈번히 사용됨으로써 ‘民族’의 개념적 등가물로 기능하였다. 동시에 기존의 수동적 피지배민을 의미하던 ‘인민’, ‘동포’는 점차로 정치적 행동주체, 더 나아가 주권자의 의미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망 전야(1905-1910)에 가서야 ‘國民’ ‘民族’ 개념이 정치적 기본개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의 경우 1908년이 되면 그 빈도수에서 ‘국민’이 ‘인민’을 능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또한 빈번히 사용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의 미래국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국민’을 ‘신민’으로 동일시하려는 시도부터 개화파의 ‘인민’ 개념과 동의어로 사용하려는 시도, 나아가 ‘국민’을 서양의 국민/민족 개념의 의미에서 주권자로 이론화하려는 시도까지 다양한...
[학술논문] 남북 이데올로기로 인한 지식인의 좌절: 월북 국문학자 김삼불(金三不)의 삶과 행적
...대한 성과를 점검할 때마다 항상 언급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월북학자”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생애는 물론 그의 연구 업적에 대한 의미 부여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이 글의 목표는 그의 생애를 복원하고, 해방 직후 남한과 월북한 뒤의 북한에서의 연구 업적을 검토하고 그의 위상을 찾는 것이다. 김삼불의 연희전문학교의 학적부와 동기생들의 증언, 『매일신보』를 비롯한 신문, 잡지에 실린 기사, 시인 정지용, 역사학자 김성칠, 국문학자 이병기, 이명선 등의 회고록, 그가 남긴 저작물에 의거하여, 생애를 출생에서부터 연희전문학교 졸업시기, 서울대학교의 편입과 본격적인 학문 활동 시기, 한국전쟁 때의 행적과 월북 직전의 활동, 월북 이후의 활동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가 거둔 학문적 업적을 좌익 계열 문학연구자들이...
[학술논문] 해방이후 《동학사》의 비판적 수용과 농민전쟁연구
...기술에서 여러 가지 착오가 있었다. 우선 ‘역사소설’이라는 표지에 대하여 당시 조선총독부의 전시통제로 인하여 수많은 책들이 판매 금지를 당하는 상황이었으며, 특히 영창서관과 발행자인 강의영 명의의 출판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오지영의 저작은 판매 금지 대상이 아니었다. 이유의 하나로 1940년 1월 4일자 『매일신보』기사를 검토하였는데, 오지영과 영창서관은 중일전쟁 선전에 일부 협조함으로써 출판 자체의 탄압은 받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다음으로 해방이후 《동학사》의 영향과 농민전쟁 서술의 변화에 대해서 우선 당시 김상기의 『동학과 동학란』에는 오지영의 서술에 대해 언급되지 않았으며 물론 폐정개혁 12개조도 분석되지 않았다. 반면 정규호는 개별 논문에서 오지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