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北韓 歌劇 紅樓夢 연구
1961年,金日成在訪華時觀看了上海越劇團的≪紅樓夢≫,在他的倡議和指導下,朝鮮曾以“唱劇”的形式改編並演出≪紅樓夢≫。朝鮮唱劇≪紅樓夢≫對情節的處理、對人物感情的把握,都基本尊重原著和越劇≪紅樓夢≫。2009年,爲迎接朝中建交60周年,金正日提出對≪紅樓夢≫進行再創作,將50年前的原作進一步潤色,讓歌劇≪紅樓夢≫重回舞台。朝鮮版的≪紅樓夢≫是由國家級血海歌劇團198名成員參加演出,導演蔡明錫,編劇趙靈出,作曲李冕相。幾位≪紅樓夢≫的主演都是“80後”青年演員。2010年,血海歌劇團的歌劇≪紅樓夢≫在華亮相,感動中國人。歌劇≪紅樓夢≫分6場,以寶、黛愛情爲主線,呈現了大觀園初見、月下定情、共讀西廂、寶玉挨打、黛玉葬花和騙婚等情節。歌劇≪紅樓夢≫對於朝中文化外交有特別重要的意義。
[학술논문] 越劇 ≪춘향전≫ 비교 연구(1)-북한 창극 ≪춘향전≫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春香傳≫在韓國古典文學史上的地位,正如≪紅樓夢≫之於中國古典文學一樣,是韓國人家喻戶曉的一部古典文學名著,作爲亞洲三大古典巨著之一。≪春香傳≫則被譯成漢、英、法、俄、德、日等十幾種文字。在中國1954年根據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國立古典藝術劇場同名演出本移植改編。劇本由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外務省安孝相翻譯,華東戲曲研究院編審室改編,莊志執筆。越劇≪春香傳≫於1954年8月2日,由華東越劇實驗劇團二團首演於長江劇場。劇本被編入1955年出版的≪華東地方戲曲叢刊≫第4集。1955年≪劇本≫月刊6月號發表了該劇。1955年8月和1962年5月,上海文化出版社和上海文藝出版社先後出版了該劇的單行本。徐玉蘭、王文娟主演的此劇中主要唱腔,已被中國唱片社和音像出版單位制成唱片和錄音帶發行。本論文通過越劇≪春香傳≫和唱劇≪春香傳≫的比較硏究, 分析越劇≪春香傳≫的特徵。
[학술논문] 해방기 창작 창극과 국민/여성
본 논문의 목표는 해방기에 활동한 창극단들의 향방을 추적하고 창작 창극의 경향성을 해석하며, 창극에서 ‘국민과 여성’이 재현되고 동원되는 양상을 밝히는 것이다. 미군정기에는 조선고전음악연구회와 국극사가 새로 조직되어, 당대 현실을 배경으로 한 창작 창극을 공연했다. 광주 지역에서 결성된 조선고전음악연구회는 <건설하는 사람들>(1945)을 여러 지방에서 공연했고, 북한 지역에 유사한 이름의 단체가 조직된 즈음 사라졌다. 서울에서 결성된 국극사는 농민의 갈등을 경희극풍으로 다룬 <청산도 절로 사람도 절로>(1946)를 공연하며 일제 말기에 인기를 끈 박귀희의 여창남역 표현술을 재활용했다. 창극이 민족오페라로 불린 정부수립기에는 (역사)설화 소재작들이 공연되었는데, 항일을...
[학술논문] 1950-60년대 북한 음악계의탁성 제거 논쟁 검토
...종파투쟁으로 인해 월북음악인들은 그 이전과는 달리 수세에 몰리던 시기에 재북음악인은 민요스타일의 창극인 <배뱅이>(19 58)를 창작하였다. <배뱅이>에서는 기존의 판소리스타일 창극에 요구되었던 남녀성부 분리와 함께 민요에서도 보이는 탁성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59년부터는 탁성 제거에 대한 논의가 격화되면서 보수성의 아이콘인 탁성은 무조건 제거되어야 하며 “조선 맛을 맑은 소리로” 내는 것으로 기울어 갔다. 그리고 1960년에는 탁성제거와 남녀 성부 분리를 위한 방법에 대하여 완전한 의견의 합치를 보았다고 천명하게 되었고 1962년 완전히 탁성이 제거된 창극 <홍루몽>을 올림으로써 북한의 탁성 논쟁은 탁성 제거로 귀결되었다. 결국 월북 후...
[학술논문] 북한 민족음악의 변천과정에 대한 고찰 - 8.15광복으로부터 1970년대까지를 중심으로 -
...자율화(自律化)시기(1945년 광복-1950년대 말), 민족음악 주체화(主體化)시기(1960년대), 주체음악 일원화(一元化)시기(1970년대)로 나누어 고찰해보았다. 자율화시기에 북한의 민족음악은 기본상에서 자율적으로 전승되었으며 개혁작업도 아직은 전통과 개혁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판소리에 기초한 창극이 성행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주체화시기에 이르러 북한의 민족음악은 철저한 선별작업과 전면적인 개혁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나타나며 창극이 사라지고 민요음조와 혁명가요음조에 기초한 민족가극이 성행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원화시기에는 민족악기개혁이 완성단계에 들어서게 되었고 전면배합과 부분배합으로 나누어지는 배합관현악편성이 확립되었으며 민족가극 대신 <피바다>식 혁명가극이 성행을 이룬 것으로 보여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