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사상계 경제팀’의 개발 담론
...축적해온 개발 담론이 군사정권의경제개발계획에 일정하게 반영되면서 자본과 시장 주도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국가 주도의 계획이라는 방식으로 정초된 점에 주목해야 한다. 6․25 전쟁 후와 군사정권 등장 후 균등경제와 공익실현을 위해 마련되었던 헌법 조항들이 대폭 손질됨으로써 제헌헌법에서 국가에 부여되었던 역할 중 공공성의 영역은 현저히 축소되었고, 국민생활은 자본의 논리와 생산력 지상주의에 밀려날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생활의 안정과 향상, 복지국가의 실현이라는 국가의 역할은 여전히 군사정권 경제개발계획의 기본 목표로 표방되고 있었다. 이는 적어도 군사정권이 국민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변화와 혁명을 표방할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일종의...
[학술논문] ‘80년대 남북관계와 한국사회의 대북관: 이상과 현실
1980년대는 한반도 현대사의 격동의 시대였다. 남한에서는 군사정권이 출범하고 민주화 운동이 본격화되었으며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2대 세습이 공식화된 시기다. 6.25 전쟁이후 처음으로 남북관계의 접촉면이 사회전반에 확대됨에 따라 한국사회의 대북관이 변화의 씨앗을 잉태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80년대 한국사회의 대북관은 현실과 이상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80년대 남북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이견이 합리적이고 생산적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국내 정파간에 정치적 이해득실과 맞물리면서 체계적인 사회과학 논쟁이 이루어지지 못한 시대적 상황은 오늘날 남남갈등에 근원이 되고 있다. 특히 북핵문제가 표면화되기 전이라 국제정치적 갈등구조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북한문제도 아직은 국제화되기...
[학술논문] 북한의 사회주의사상의 전개와 북한헌법에의 영향 - 이른바 주체사상 및 선군사상과 관련하여 -
...사회주의사상을 지도한다는 이념이므로 잠정적으로 작동할 뿐 계속해서 북한주민을 설득할 수 있는 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전제적 군사정권은 북한주민의 사상적 결집과 관련없이 독재정치를 계속적으로 자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누구든지 군부세력을 장악하여 자신의 권력아래 두기만 한다면, 그가 누구든지 간에 전제적 군사정부의 1인지배자가 될 수 있음을 또한 의미한다. 이러한 점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 북한의 군사정권이 만약 사상적 결집을 이루지 못하면 배고픔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자칫 군사정권의 세력이 양분하게 되면 이원화된 세력의 극단적 충돌에 의해 위로부터 와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정권이 무너지게...
[학술논문] 대한민국 민족 서사시: 종족적 민족주의의 전개와 그 다양한 얼굴
...전두환 정권의 반공주의를 통해 북한을 타자화, 악마화하며 남북한의 형제자매를 하나의 순수한 종족으로 통합하는 통일민족국가를 상상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승만에서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반독재 민주화 담론에서 감상적인 차원에 머물렀던 민족통일 담론은 5·18 광주민중항쟁에서 촉발된 반미적 학생운동의 성장과 함께 미국과 꼭두각시 대리군사정권이라는 또 다른 종족의 적을 상정하며 투쟁했던 저항의 종족적 민족주의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분화 속에서 급진적 반미주의에 기반을 둔 학생, 시민사회 진영의 종족적 민족주의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전위대로서 한국사회의 진보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주체사상과의 연결고리로 인해 정권의 탄압과 함께 대중 정서와 괴리되는 위기를 맞았고 이러한 위기 속에서 저항의 종족적...
[학술논문] 박완서 소설의 ‘공모’ 의식과 마음의 정치—1987년 이후와 박완서 소설의 1970년대 서사
박완서는 1989년 <복원되지 못하는 것들을 위하여>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1987년 전국적인 시위를 거쳐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어내고서, 한국사회는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시기로 접어들었던 때이다. 1961년 박정희 군사 정권시절부터 전두환 대통령 시절을 거쳐 1987년에 비로소 이루어진 직접 선거제도는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한국사회를 기대와 희망으로 들뜨게 만든다. 그리고 실제로 1988년 월북작가의 해금조치를 비롯하여 과거사를 청산하는 여러 가지 복권운동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1970년 등단하여 줄곧 반공주의의 영향력을 다뤄온 박완서는 1970년대 어느 작은 마을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치룰 때마다 마을의 주민들이 권력의 편에 서기 위해 스스로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