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1960년대 후반 북한의 군사모험주의와 당․군 관계 변화
이 연구는 1960년대 후반 북한의 군사모험주의 전략의 변화가 당·군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분석하였다. 북한의 군사모험주의는 무력통일의 호기(好期)를 잡으려는 강박감의 표출이자, 대내외적 상황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북한의 군사모험주의가 가장극렬했던 1968년에 벌어진 1·21 청와대 기습과 푸에블로호 나포, 울진· 삼척 무장공비침투는 시기별로 변화된 군사모험주의 전략이 반영된 결과였다. 1968년 중반에 들어 군사모험주의 전략은 크게 수정되었다. 그동안 군사모험주의 전략 추진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던 군부강경파는변화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완전히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군부강경파를‘군벌관료주의자’로 매도하며 역사의 무대에서...
[학술논문] 1960년대 북한의 군사주의 확산 과정 연구
...경제· 국방건설 병진노선을 강화하고 군사비를 대폭 증액시켰다. 이러한 군사력 강화 정책은 군대의 정치적 참여 확대 및 군사주의의 제도화로 이어졌다. 또한 군부의 정책결정 영향력 증대와 군사력 강화는 김일성의 한반도 혁명 완수 의지와 맞물려 1968년 전후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등 공세적·군사적 모험주의를 추구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군사주의의 확산은 경제발전전략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군사력 건설이 국가 정책에서 특별한 우선권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이 정책화되어 등장한 것이 바로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이었다. 북한 주민들 역시 ‘중공업 우선 발전론’과 ‘군중동원을 통한 속도전식경제성장’...
[학술논문] 베트남전쟁 시기 북한의 대외정책
...일본 군국주의는 완전히 부활하자 1970년대 들어서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의 반제공동투쟁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낮추고, 아시아 혁명적 인민들의 반제공동투쟁, 반미반일투쟁을 강하게 촉구했다. 한편 북한은 베트남전쟁 초기 남한에서 반전의식을 매개로 남조선혁명의 기운이 무르익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남한의 반전운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모험주의적 군사행동 탓에 남조선혁명 가능성이 더욱 낮아지자 박정희 정부와의 대화노선으로 전환했다. 더불어 미군이 1973년 3월 베트남에서 완전 철수하자 7·4남북공동성명의 반외세 조항, 베트남에서 미군의 완전 철수 등을 명분으로 삼아 미국에게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완전 철수 등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동북아시아에서...
[학술논문]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와 대북 경제제재 심화에 따른 동북아 국제관계 변화
...안보불안, 미국의 핵우산 지속에 대한 우려 등으로 한미동맹도 영향을 받게 되었고, 미국은 그간 지속해온 바퀴살 모양의 동북아 동맹네트워크 속에서 한국의 독자 핵무장을 제어하기 위한 동맹제 지의 노력을 기울일 가능성도 증가한다. 중국 역시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했고, 한미동맹의 강화로 인한 이익의 손실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북한의 모험주의적 행동을 막기 위해 다양한 동맹제지의 방법을 사용하여 왔는데, 향후에 어떠한 대북 정책을 펼지 주목해야 한다. 둘째,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는 주변국들의 이해 관계가 어디까지 일치하고, 어디에서부터 분기하는 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점이었다. 주변국은 모두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이를 위해 북한의 정권 생존 자체를 위협할 정도 제재를...
[학술논문] 냉전분단시대 ‘對遊擊隊國家’의 등장
...‘유신체제’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거시적으로 검토하여 그 체제에 기반한 국가의 성격을 밝히는데목적이 있다. 이 국가체제의 등장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 만주국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反滿抗日세력에 대한 치안숙정공작에 앞장서며 일제의 防共 戰史로서 양성된 조선인들의 경험을 파악해야 한다. 1968년 북한의 군사모험주의적인유격전 전개와 동아시아 냉전질서의 변화를 계기로 1972년까지 국가체제의 재편을 주도한 이들이 만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전까지 이들이 지녔던 인식과 경험은 새로운 국가체제 수립을 주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시기 국방국가론 학습을 통한 국가체제 인식과 ‘공비토벌’이란 경험은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