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사할린한인 귀환문제에 대한 전후 일본정부의 대응
...본국 정착, 귀환비용의 부분 지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등 약간의 태도변화를 보였으나 소련의 미그기망명사건으로 일소관계가 경색되면서 빛이 바랬다. 그 후로 약 10년 동안 외교교섭이 정체된 사이에 사할린재판 등을 통한 시민운동세력의 비판, 이것과 연계된 야당의원의 압박, 그리고 국제인권규약 비준과 난민조약 가입 후 재일동포와 사할린 한인의 인권상황과 관련한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 등으로 일본정부는 한인 희망자의 일본영주귀국을 허가하고 한국가족과의 임시상봉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정부의 외교교섭은 ‘사할린 한인의 귀환문제는 북소 간의 문제’라는 소련정부의 오랜 방침이 페레스트로이카와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폐기되는 1980년대 말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학술논문] 이루어지지 못한 귀환: 소련의 귀환 정책과 사할린한인
...민간인 송환을 주장한 사할린 점령군과 생산시설 유지 및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 송환을 저지하고자 한 사할린 민정국의 갈등, 그리고 양자의 대립 속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한 소련 중앙정부의 태도 때문이었다. 한편 한인 귀환에 대한 검토는 탈출에 성공한 한인에 관한 해외 언론보도, 일본 규슈에 전환배치된 한인들의 진정 결과 연합국총사령부(GHQ/SCAP)가 사할린한인 규모와 귀환희망 여부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며 시작되었다. 1947년부터 이 문제가 공론화되자 골리코프를 중심으로 한 점령군은 1948년 외무장관 몰로토프를 설득해 한인들을 북한으로 모두 보내고자 구체적인 실무계획안을 확정했다. 반면에 1948년 크류코프를 중심으로 한 사할린 민정국에서는 외무차관 말맄을 통해 생산활동의 파국 방지를 명분으로 한인의 송환을...
[학술논문]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전후 강제동원 피해의 범위와 보상논리 변화
...남양지역, 북한, 중국 등에서의 피해도 한국 국적을 지닌 유족이 신고 가능하게 했다. 현재 한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법」이 1970년대의 대일민간청구권보상체제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 지원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내동원이나 국외동원으로 나눈 것은 적어도 이 「대일민간청구권보상법」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사할린 한인의 경우도 미귀환의 문제는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사망자에 대한 보상 및 미불금 관련 보상에 대한 청구권은 역시 당시에 해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법」의 지원대상의 제한에 대해서는 보다 역사적으로 면밀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학술논문] 구술을 통해 본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이 글은 구술을 통해 사할린 한인들의 고향과 사할린으로 들어오게 된 과정, 사할린에서의 교육 문제와 조선학교, 교육과 조국으로 가기 위해 북한으로 간 사람들, 소련 국적 취득과 대학 입학, 사할린에서의 일상생활 등 사할린 한인들의 역사와 삶을 조명하고자 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자발적으로 또는 징집을 통해 노동자로 간 사람들, 사할린의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북한에서 모집해 온 사람들, 사할린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교육하고, 사회주의 시민으로 편입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할린 한인들 대부분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고향이었다. 사할린의 서부지역에 있는 탄광 도시들에 살고 있는 일부 사람들은 북한이 고향이기도 했다. 사할린에는 1946년부터...
[학술논문] 1950년대 사할린 조선순회극단 연구 — 러시아국립문학예술문서보관소(РГАЛИ) 자료에 기초하여
... 1940~50년대 극단 관련 문서와 사진, 스크립트 등으로 이루어졌다. 본 연구의 가치는 상기 자료에 있다. 이 자료의 최초 열람자는 본 연구자이다. 더욱이 사할린 조선순회극단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본고는 사할린 한인 조선순회극단에 대한 초기 연구라 할 수 있다. 사할린 조선극단의 창립 목표는 “민족극단 건립”이었다. 이를 통해 사할린 한인 주민을 하나의 강건한 공동체로 조직하는 것이 조선극단의 과제였다. 그 이유는 사할린 한인의 불안정한 정체성에 있었다. 이들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소비에트 시민으로 결집시켜야 했다. 사할린 조선순회극단은 1920년대 연해주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던 고려인 극단과는 그 출발이 달랐다. 사할린 조선극단의 설립과 운영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