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군사]
...style="color:#80888a">마오쩌둥 시대와 달리 시진핑 시대의 항미원조 서사는 ‘공산당의 위대한 승리’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열강에 침략당해 온 중국’이라는 과거의 역사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민족적 치욕을 부각하는 중국의 근현대사 교육은 기존 사회주의 체제가 위기에 봉착한 1990년대를 기점으로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다. (…)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국가 통합 논리로 부상했으며, 특히 외부의 적에 대한 저항적 내셔널리즘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려 인민을 결속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항미원조는 장기간 이어질 중·미 패권 경쟁...
[정치/군사]
...사령관이 있었다고 꼬집었다. 백 장군이 지적한 것처럼 당시의 잘잘못을 기록해 귀감으로 삼으면서도 열악한 상황 속에서 분투했던 국군에 대해 애틋하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때도 됐다.
베이징 특파원 시절 김정일의 방중이나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북-중 관계에 변화 조짐이 보일 때 접경 도시 단둥에 종종 갔었다. 단둥 시가지 뒤편 잉화산에 세워진 항미원조기념관에도 들렀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 취재차 단둥에 가서 과거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됐다. 단둥은 북-중 교역의 최대 관문일 뿐만 아니라 6·25전쟁의 상흔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미군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 ‘단교(斷橋)’ 위에 중공군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1950년 10월...
[법/인권]
...북한은 미국의 석방 요청을 받아들였다.
두 번째는 6자 회담 재개 논의였다. 당시 스티브 보스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성 김 부대표는 북한과의 6자 회담 재개를 위한 북측과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북한은 비핵화 협상에 나서는 조건으로 인도적 지원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보스워스 대표는 “북측이 식량원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식량원조는 미국이 얼마나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명백한 잣대로 간주되었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사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이 인도적 사안을 정치적 사안과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게 제공돼야 하지만 북한은 억류된 미국인을...
[학술논문] 북한의 전후복구 시기 사회주의 진영의 원조와 ‘주체’의 제기(1953∼1955)
...근래에 해제된 구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외교문서들을 바탕으로, 1953-1955년 북한의 전후복구건설시기에 사회주의 진영의 원조와 압력, 당내 경제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주체의 제기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는 명제나 가설의 일반화, 보편화에 역점을 두기보다 역사적 사실의 심층 분석에 큰 비중을 두고 개별 역사적 사례에서 드러난 북한과 사회주의 진영의 관계 양상, 그리고 이 속에서 나타난 북한 지도부의 대응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김일성 지도부는 전후 복구를 시행하면서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경제원조와 이를 바탕으로 한 형제국가들의 정책수정 요구, 그리고 당내 소련파와 연안파의 비판으로 점차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였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진영의 외압과 함께 소련파와...
[학술논문] 중소분쟁시기 북방삼각관계가 조소·조중동맹의 체결에 미친 영향(1957~1961)
본 연구는 중소분쟁시기 북방삼각관계가 1961년 7월 「조소 · 조중우호협조 및 상호원조 조약」의 체결에미친 영향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려는 목적을 지닌다. 구체적으로 북한이 어떻게당시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던 두 사회주의 거대 국가인 소련 · 중국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는지 그 원인과 과정, 그리고조약에 대한 북방삼국의 평가를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북한 체제의 존립과 발전에 있어서 중 · 소의 후견적 역할은 결코간과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동맹체결에 관한 논의는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단순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는경향이 있었다. 새롭게 공개된 일부 구사회주의권 외교문서와 북한 1차 문헌에기초하여 논문은 크게 세 부분을 살펴보았다. 첫째,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분열이가속화되고...
[학술논문] 북한경제의 탈산업화와 관료의 자기특권화 경향: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북한경제의 ‘정치적 네덜란드 병’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이 논문은 국제사회의 도움과 협력이 김정일 시대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북한의 정치와 경제에 미친 영향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북한체제는 1990년대 경제위기 이후 해외원조, 자원수출, 경제협력 등 외연적 렌트(external rents)가 국내로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경제의 위기는 지속되었다. 오히려 관료계급의 자기특권화의 경향이 더욱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첫째, 국방공업과 중공업 부문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계획경제와 전통적인 현존 사회주의 지배질서를 복원하려 시도한다. 둘째, ‘돈주’로 일컬어지는 신흥 부유계층과 결탁하여 비생산적 시장화 과정에서 렌트를 추구한다. 그 결과 산업구조의 불균형이 더욱 악화됨으로써 탈산업화가 발생하게...
[학술논문] 북한 문화협정의 전개양상과 그 특징 ―광복 이후부터 1950년대를 중심으로
...1950년대까지 북한의 대외문화교류 전개 양상과 문화협정 분석을 목적으로 한다. 북한은 광복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국가정체성을 인정받고, 문화와 경제 분야의 협력을 얻기 위한 외교에 주력하였다. 때문에 광복 이후 북한의 대외문화교류는 사회주의 선진국인 소련 체제를 수용하는 데 주력하였고, 휴전 이후 전후 복구 건설을 위한 경제외교에 주력하였다. 문화협정이었지만 경제협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기 문화협정은 북한 체제를 인정받기 위한 주요 외교 수단이었으며, 실질적인 경제 원조 사업의 명분이었다. 북한은 광복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대외정책 목표를 ‘국제혁명역량과의 연대성 강화’ 및 ‘국제 친선과 협조관계’ 달성에 두고, 외교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적극적인...
[학술논문] 『로동신문』을 통해 살펴본 북한의 전후 복구 과정(1953~1958년)
이 논문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부터 1958년까지의 『로동신문』을 통해 북한의 전후 복구 과정을 분석한 연구이다. 이 시기의 『로동신문』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정전협정 체결 후 1950년대 북한의 전후 복구 과정은 북한의 정책과 주민, 기관, 사회단체의 노력,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의 원조와 중국인민지원군의 노동력으로 이루어 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북한은 『로동신문』을 활용하여 주민들에게 전후 복구 사업을 선전, 선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