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MODIS 광합성유효복사흡수율과 WRF 기상자료를 이용한 북한지역의 총일차생산성 추정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MODIS GPP 자료는 육상식생의 총일차생산성(GPP) 모니터링에 중요한 수단을 제공한다. 그러나 GPP 추정의 입력자료로 사용하는 DAO기상자료의 거친 공간해상도(1.25°×1°)와 FPAR 자료의 구름영향에 의한 신뢰도 저하 등은 지역 수준의 GPP 모니터링에 문제를 야기한다. 이 연구에서는 북한지역을 대상으로 FPAR의 구름영향 제거하고 고해상도(3 km×3 km) WRF 기상자료를 사용함으로써 입력자료의 문제를 개선한 GPP를 추정한 후, 2000-2008년 간의 GPP 연간 변동특성 및 지역적 분포특성을 분석하였다. 개선한 GPP는 2000년의 645 gC m-2 y-1에서 2008년의 863 gC m-2 y-1까지 변화하였고, 혼효림지역이
[학술논문] 발해성곽의 구조와 형식에 대한 연구
... 현의 소재지나 방어시설 등에 대치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발해는 다민족 국가이므로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성곽 건축에도 반영되었다. 방형과 장방형의 정형화된 평면형태, 남쪽에 설치된 문, 토축 구조, 방어시설이 거의 없는 것, 장안성의 형태를 모방한 것, 내성, 궁전 건물의 위치 등은 중국 건축전통의 영향을 받고, 석축과 토석혼축, 치·각루·옹성 등의 방어시설과 산성의 축조 등은 고구려 성곽건축의 영향으로 이해되며, 이후 발해만의 특징으로변모하여 토석혼축성을 많이 이용하게 된다. 말갈의 전통은 토축, 산성, 완성되지 않은 성벽 등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상당 수 성곽에서는 발해 이후 시기인 요대와 금대에 개축되면서 치, 옹성, 각루가 설치된 것이 확인된다.
[학술논문]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高句麗의 南進과 對新羅 領域向方
...阿旦城[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이었다. 전투의 시기는 장안성 공사 완공 이후와 수와의 관계를 고려해 593~594년으로 추정했다. 온달은 영서와 중부내륙을 남북으로 이어주던 죽령로를 경유해 단양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아단성 전투의 패배로 도리어 신라가 죽령로를 통해 북진하는 기회를 맞았다. 신라는 7세기 초반까지 북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핵심 거점인 춘천 지역까지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구려는 603년 8월 北漢山城[아차산성]을 공격하였지만 신라군에 패했다. 신라는 북한산성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604년 南川州를 폐지하고 北漢山州를 다시 설치하면서 한강 이북의 방어체계를 본격적으로 마련했다. 그러나 608년 2월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고 牛鳴山城[춘천 일대]을 내주고 말았다. 다만 우명산성 전투로 되찾은 고구려의...
[학술논문] 개성공단의 임금수준은 적정한가?
흔히 개성공단의 가장 커다란 장점은 저렴한 북한 노동력의 활용에있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국가적차원에서 볼 때 개성공단의 임금수준은낮으면 낮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개성공단의 목적은 단지 입주기업의 수익성확보에 있는 것이 아니며, 개성공단에서의 협력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남북 상생의 경협모델을 만들고 경제공동체의 기반을 닦으며 북한의 개방 · 개혁을 촉진함으로써 순조로운 통일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개성공단의 낮은 임금이 가지는 입주기업 차원에서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왔을 뿐미래지향적인 국가적 관점에서 임금수준의 적정성 여부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없었다. 연구 결과 한계노동생산성 추정을 비롯하여 남한과의 비교, 실제 현장조사 결과와의 비교,
[학술논문] 百濟의 倭使國書奪取사건 -602~3년 阿莫城․ 北漢山城 전투와 관련하여-
Sui Dynasty centered world order existed asJapanese scholars insisted,but it was incomplete and didn't last long. Japanese king sent a diplomatic message to the emperor of China. Chinese emperor sent a message in reply to the king of Japan, But Baeje seized the message in the presence of the Chinese envoys. In 601 Japan proposed Goguryeo and Baekje to attack Shilla. In March,602, the Japanese ar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