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관점과 태도로서 ‘內在的 發展’의 形成과 1960년대 동북아시아의 知的 네트워크
관점과 태도로서 ‘내재적 발전’은 1960년대 들어 3국의 현실과 조응하며 더욱 숙성해 갔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 수립의 합법칙성을 해명하는 차원에서 조선사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식민사관을 규명하고 비판하였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식민사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역사상을 모색해 갔다. 상대적으로 일본의 조선사연구회 회원들이 한국의 한국사 연구자보다 더 철저히 식민사관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였다. 일본의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연구자는 북한과 남한의 학문을 연결하는 매개자였다. 북한과 일본 간의 네트워크는 조직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상대방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검토도 공식적이고 체계적이었다. 남한과 일본의 연계는 직접적, 개별적 관계가 중심이어서 전면적인 검토가 제대로...
[학술논문] 한국전쟁 직후 남북한 전통음악연구 배경과 양상
...남북한에서 이루어진 전통음악과 관련한 연구가 어떠한 배경 하에, 어떤 내용과 어느 연구자에 의해서 연구되었는지 비교 고찰해 보고자 하여 1950년대 남북한의 저술 목록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휴전으로 매듭을 지은 남북한은 이념을 달리하는 두 체제로 갈라졌지만 일본 제국주의 논리로 세워진 식민사관(植民史觀)적 학문 풍토를 타파하고 민족주의(民族主義)적 관점으로 바로 세운 학문을 구축해야 하는 공통된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한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학문적 토대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국가와 학자와의 관계라는 면에서 경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남한은 학자 개인의 의지로, 북한은 국가가 주도하는 상반된 연구경향을 띄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전통음악의 연구 경향도 다른 점을 보였다. 남한은 이혜구(李惠求) ·...
[학술논문] 북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문제 : 한일회담의 경험과 그 함의를 중심으로
...‘반환의 법적의무 문제’에 대해 불법으로 약탈된 문화재에 대한 사죄와 반환 요구라는 북한의 입장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문화재를 반출했다는 일본의 입장과 충돌할 것이며, 한일회담과 같이 인도로 타결될 가능성이 높다. ‘반환 문화재의 범위 문제’에 대해 일본 측은 한일회담의 경험에 비추어 북한 출토 문화재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고, 이에 따라 북한 출토 문화재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반환 문화재 품목 문제’에 있어서 북한은 낙랑 관련 유물, 오구라 컬렉션, 평양 율리사지 팔각 오층 석탑의 반환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식민사관의 정립 수단, 그리고 난굴된 약탈 문화재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낙랑 관련 유물을 우선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학술논문] ‘만주’ 표상의 조선 고대사 -1950~60년대 북한 역사학계와 고대사 연구의 지향-
...전기를 맞이한다. 가장 먼저 사회경제 구성에 입각한 조선사의 기원과 시대구분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여 고대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획정하고, 곧이어 고조선의 중심지와 영역 문제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박시형의 발해사 연구도 이루어진다. 이 과정 속에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조선사 체계를 완성했으며, 해방 후 오랜 과제였던 식민사관 극복을 위한 고대 조일 관계와 광개토왕비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들도 내놓았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조선사 체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중국 동북지역(만주)의 조사 연구가 필요했는데, 마침 소련과의 대립 과정에서 북한의 지지가 필요했던 중국은 공동 조사연구(1963~1965)를 승인했다. 이 조사연구는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소장인...
[학술논문] 남·북한 단군인식의 비교연구 -신석호와 리지린을 중심으로-
...실제의 역사와 다르므로 고조선 건국연대 BC2333년은 믿을 수 없다. 둘째, 단군신화는 고려 충렬왕 때 쓰여진 개인의 창작품라서 그것을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석호는 이러한 인식을 시스템화했다. 신석호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총독부 사관을 검증하고 또 그것을 견고히 다진 후 각 대학의 교수로 임명하여 식민사관을 퍼트리는 구조를 구축했다. 반면 북한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식민사관 청산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리지린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북경대에서 수학했는데, 그의 스승은 고사변학파를 이끄는 고힐강이었다. 리지린의 박사 논문 주제는 고조선이다. 고힐강은동북 3성이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리지린의 연구에 우려를 표했는데, 그것은역사가 정권과 영유권의 정당성에 대해서 말해주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