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내일은 다시 희망을 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반적인 통일의 장밋빛 전망과는 다른, 통일이 오히려 우리 삶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함께 제시했다. 좌와 우를 막론하고 통일이 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긍정적인 전망이 압도적이다. 예컨대 누구나(?) 통일 이후 군대를 안 가도 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믿음은 바람일 뿐, 객관적인 전망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 민족의 큰 미래를 이웃 나라들이 과연 그대로 두고 볼까? 통일 이후 더욱 강한 군대가 필요하게 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민족의 성원으로서 더 많은 짐을 짊어져야 한다. 다른 문제도 마찬가지다. 통일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면, 굳이 통일을 왜 해야 할까? 이런 어이없는 물음에는 굳이 답변이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통일은...
[정치/군사]
...알바니아 학생이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가두 데모는 코소보 자치주 전역으로 확산되어 군대와 충돌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분쟁의 세 번째 원인은 종교적인 이유이다. 잘 알고 있듯이 팔레스타인 분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팔레스타인은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등 3개 종교의 성지 예루살렘이 있는 지역이다. 유대교도와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의 종교적인 분쟁에 강대국의 패권 장악을 위한 정책으로 인해 지금껏 첨예한 분쟁의 불씨를 꺼뜨리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분쟁의 원인으로는 민족적, 문화적, 언어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미얀마 같은 다민족 국가의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 운동을 살핌으로써 알 수 있다. 옛 식민지 지배국의 인위적인 세력 범위를 그대로 국가 영역을 확정한 경우 문제가 있는데, 이들은...
[학술논문] 냉전체제 형성기(1945~1948) 中華民國의 한국인식 - 국민당 언론의 한국 기사를 중심으로 -
...『대공보』‧『신보』‧『중앙일보』의 한국관련 보도를 통해 냉전초기 한‧중 관계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전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미·소 주도의 냉전체제로 급속히 재편되었다. 전승국인 중국은 국공내전에 휩싸여 대외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고, 동아시아 질서재편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다. 전후 한국문제처리에서 중국은 미·소의 주도로 진행된 국제논의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단지 역사적 현실적으로 긴밀한 연대와 외교적 후견역할을 통한 도의적 책임론을 내세워 한국문제에 적극적으로 의사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자국의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미국의 후원과 협력에 의해 제한적 역할만 가능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이 줄곧 주장해온 4개국 협의에 의한 한국독립과 미·소 군대의 철수는 끝내 관철되지 않았다. 남북한 분단 및 미군정의 평가와 관련하여 중국...
[학술논문] 북한의 남한 군사연구 현황과 특징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analyze how North Korea has studied about the operations and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ROK) military defense system on the basis of research data and DB collected at home and abroad. To do it, this paper used a wide range of regular or irregular periodicals and books on research on the ROK made by North Korea, which have held at home and abroad up to
[학위논문] 조선인민군의 사회주의 농촌건설 참여와 ‘군민일치(軍民一致)’ 사회 형성(1945~1972)
...검토하였다. 해방에 뒤이은 남북 분립의 형세와 전 세계적 냉전 질서의 형성은 무력기관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군사력은 사회경제적 토대에 의존한다. 북한의 노동집약적 경제구조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군대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역사적 조건으로 작동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인민군을 단순히 국방, 안보의 주체로만 인식하는 한계를 극복하고 북한 사회주의 건설의 중요 행위자로 상정하고자 했다. 농촌에 주목한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먼저 해방 이후 북한 인민의 다수가 농민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말기 농촌의 경제적 피폐와 공업 중심의 경제 건설은 농촌에 대한 당과 정부의 개입 가능성을 확장하였다. 나아가 농촌은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함께 냉전 시기 주요한 ‘투쟁’의 공간으로 부상하였다.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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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제1・2차 國共合作期의 한・중 연대활동 -黃埔軍官學校 인맥을 중심으로-
중국 제1차 國共合作의 상징으로 1924년 중국 廣州에 건립된 黃埔軍官學校는,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 양측의 군사 지도자와 무수한 혁명가를 배출하였고, 동방의 여러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청년들을 흡인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본고는 식민지기 韓人들이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받은 사상적 영향과 인맥, 그리고 항일전쟁기까지의 한중연대 활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았다. 황포군관학교는 이전의 군사교육기관과 달리 정치교육이 강화되었으며, 특히 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으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이 증대하였다. 국민혁명시기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 많은 韓人 청년들은 三民主義와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였고, 여러 정치활동에 참가하였다. 楊林 등 황포군관학교의 韓人청년들은 周恩來의 영향 하에 國民革命의 北伐뿐 아니라 공산주의...
[학술논문] 高麗法學 106年의 回顧와 展望: 當代를 診斷하고 新 時代를 叡智한 國際法學
...보편적 인권개념을 소개하고 있고, 1976년도에 국제법상 강행규범을 다룬 논문은 현재 논의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매우 주목할 만하며, 황금주 사건에 대한 소개는 현재 국내적으로 논의되는 군대 위안부 문제와 매우 상관성이 높다. 이밖에 인권관련 조약의 이행 문제를 우리나라의 헌법 질서와 연계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전쟁법 혹은 무력충돌법 분야는 1907년 논단에서도 평시 국제법과 분리되어 인식되었다. 무력충돌법은 1950년대에는 국제 인권법 분야로 인식되었지만 1980년대에는 국제 인도법 분야에서 다루어졌고, 식민지 해방, 인민 자결권 행사와 관련해서 비국제적 무력충돌이 다루어졌다. 또한 미국의 예방전쟁론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논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해양법 분야에서는 해양환경 보호, 대륙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