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초기 북한 고고학의 신석기·청동기시대 구분 - 일제강점기 고고학의 극복과 문화전파론 -
... 발전은 없었다는 인종주의적 문화우열론적 전제에서 시작한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연구자와 문화는 외부에서 전파되어 온 요소로 성립 발전한다는 문화변동에 기반한 전파론적 전제의 초기 북한 고고학은 그 전제 자체는 달랐지만 결과적인 해석은 동일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문화, 청동기시대의 거석문화 등 조선의 선사시대 문화의 기원을 모두 북방지역 등의 외부에서 찾고 있으며, 이는 여러 측면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 연구자들의 선사시대에 대한 해석과 유사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엄격한 유물사관 대신 문화전파론에 입각한 도유호와 초기 북한고고학의 신석기ㆍ청동기시대의 구분, 금석병용기의 부정은 과학적이고 정확한 층위적 발굴을 통한 문화 양상의 파악으로...
[학술논문] 단군 연구사 검토 및 역사적 의미
...요동지역을 장악한 개척자로 인식되면서 중시되었다. 기자에 의한 문명교화론 인식이 부각되며 그 위상이 약화되었으나 반청인식의 중심으로 민족적 자각의 상징으로 단군은 그 위상와 역할이 부각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한 단군부정은 근거사료의 후대성과 일선동조론적 관점에서 강조되어 단군부정과 실상 왜곡이란 두 측면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 같은 문제제기에 대해 민족고유 신앙적 측면과 낭가사상의 연원으로서 단군을 부각하였다. 해방이후 산동성 무씨화상석의 연결 가능성으로 연대관 상승과 토테미즘과의 관련성 등 신화 민속적 접근과 특히, 고고학적 접근을 통해 단군의 민족문화연원으로서의 위상이 부각되었다. 한편, 북한학계는 고조선중심지문제와 함께 단군의 실재성을 강조하여 1993년 단군릉을 평양지역에 비정하고 고조선 평양중심설 및...
[학술논문] 도유호와 한흥수: 그들의 행적과 학술 논쟁(1948~1950)
도유호와 한흥수는 초기 북한 고고학계의 동향을 언급할 때 자주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유럽에서 유학하여 민속학과 선사학 등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서 활동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도유호는 193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에서, 그리고 한흥수는 1940년 스위스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각각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엔나 시절, 도유호에게 학문적으로 영향을 준 학자들은 헤르더, 그레브너, 슈미트, 코퍼스, 하이네겔 데른, 멩힌 등이다. 도유호는 헤르더의 역사철학적 인식을 토대로 변증법적 발전사관의 논리를 세웠고, 20세기 초반 비엔나학파가 주창했던 문화권설을 배경으로 민속학과 선사고고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갔다. 이러한 지적 기반 위에서 중국 도시문화의 기원에 관한...
[학술논문] 기원전 2세기대 서북한 고고 자료와 위만조선
본고는 위만조선의 재인식과 위만조선 고고학의 성립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위만조선 고고자료의 공백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위만조선은 조선 후기 正統論的 역사 체계 하에서는 왕위를 찬탈한 僭國이자 簒賊의 존재였다. 하지만 개화기에 들어 근대 국민국가와 연계된 민족이라는 실체가 서서히 자각되면서 위만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林泰輔의 『朝鮮史』에서 비롯된 식민사학의 세례 이후, 1907년 白鳥庫吉은 위만조선을 식민지로 파악하였는데, 당시 무차별적으로 도입된 ‘식민지’ 개념은 이후 식민사학의 근간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위만조선 고고학은 그 자체 내지 고조선 문화의 견지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낙랑군 사회의 토대이자 출발점으로 이해된 것이었다. 당시 非漢式 문화인...
[학술논문] 樂浪郡의 종이제작과 製紙所
...파악된다. 낙랑군과 같은 시기에 군현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의 경우도 2세기 후반경에 중국의 종이와 제지술이 보급되어 제지 수공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한군현 중에 麻・竹・楮 등 종이 원료인 수피를 수급할 수 있는 남방 지역을 중심으로 제지소가 설치되어 군현 지배에 필요한 종이를 충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영세한 보고문에 추측을 거듭하여 얻은 결과지만, 종전에 알지 못했던 종이 제작과 관련된 몇몇 사실들에 접근해 볼 수 있었다. 종이가 가지는 고고학적・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종이 유물의 발견, 제지소 또는 제지시설에 대한 고고학 발굴 조사는 다른 어떤 유적・유구보다도 중요성이 높다. 이에 본고가 야외고고학 현장에서 제지 관련 유적·유물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