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군사]
...꼭대기에 올라가려 했다. 원래 3년상을 치른 뒤 처리하려 했으나, 하루하루 놀아나는 꼴이 가관이라 부득이하게 처리했다. 그놈은 이 땅에 묻힐 자격이 없으니 화형으로 집행하라고 지시했다. 총알도 아깝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_ 343p
2014년 1월부터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장성택과 그 측근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반종파 투쟁이 전당적으로 이어졌다. 장성택 사건으로 피해를 본 인원은 3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직접 연루자 다수는 ‘죄책’에 따라 처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됐고, 지방 전출과 좌천 조치도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등 대숙청의 피바람이 불었다. _ 344p
나는 사건 당일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항공편 전광판을...
[사회/문화]
...직후 소멸한 문화통일전선에 대해서 남로당 계열, 김일성 계열(혹은 수령파), 그리고 소련계로 알려진 문학적 파벌의 입장이 무엇인가? 셋째, 문화통일전선의 형성을 둘러싼 문학자들 사이의 갈등이 순전히 문화전선분야 내부에서 발생한 문학자들끼리의 노선 갈등이었는가? 넷째, 1952년 12월 15일 조선로동당 제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박헌영 및 남로당 계열의 종파주의에 대해 비판한 이후 남로당 계열 문학자들이 숙청되거나 사형 당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 대립의 부산물인가? 다섯째,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3일 조선로동당 총정치국이 신설되고 1951년 3월 20일 이후 남로당 계열 문학자가 사상 전선에 중용된 것에 소련−구체적으로 스탈린−이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마지막, 해방 후 8년간...
[정치/군사]
...혁명가들의 사투와 최후를 엿보다
‘8월 종파사건’을 읽어야 하는 이유
우리 대부분은 ‘8월 종파사건’을 모른다. 어쩌다 그 이름을 들어본 이라도 ‘권력 장악을 둘러싼 북한의 계파 간 갈등’ 쯤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왜 벌어졌는지, 어떻게 전개되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깜깜하다. 북한사를 전공한 지은이에 따르면 그 사건은 그저 흘려버릴 사소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1960년 4ㆍ19의거가 민주화 물꼬를 트면서 ‘대한민국’의 토대를 일궈냈듯, ‘8월 종파사건’은 오늘날 북한의 유일 체제가 확립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저자의 주장이다...
[학술논문] 북한의 전후복구 시기 사회주의 진영의 원조와 ‘주체’의 제기(1953∼1955)
이 논문은 근래에 해제된 구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외교문서들을 바탕으로, 1953-1955년 북한의 전후복구건설시기에 사회주의 진영의 원조와 압력, 당내 경제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주체의 제기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는 명제나 가설의 일반화, 보편화에 역점을 두기보다 역사적 사실의 심층 분석에 큰 비중을 두고 개별 역사적 사례에서 드러난 북한과 사회주의 진영의 관계 양상, 그리고 이 속에서 나타난 북한 지도부의 대응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김일성 지도부는 전후 복구를 시행하면서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경제원조와 이를 바탕으로 한 형제국가들의 정책수정 요구, 그리고 당내 소련파와 연안파의 비판으로 점차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였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진영의 외압과
[학술논문] 김우철 시 평가 양상을 통해 본 북한 문학사 서술 변화 -‘평화적 민주건설 시기’~‘전후복구건설 및 사회주의 기초건설 시기’를 중심으로-
북한 문학사가 북한 체제의 성립과 더불어 고안된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다. 북한 문학사는 1946년 토지개혁과 민주개혁의 완성, 1948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949년 조소 및 국제주의 친선, 1953〜1956년 반종파 투쟁, 1956년 도식주의 비판, 1958년 사회주의 개조 완성, 1959년 부르주아 잔재와의 투쟁, 1967년 반종파 투쟁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서술 변화를 거쳐 왔다. 이러한 서술 변화는 ‘김일성을 주체로 하는 민족해방서사의 틀을 잡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가결한 현상이었다. 본 글은 1950년〜1990년대 사이에 출판된 5종의 북한 문학사를 대상으로, 이들 문학사에 수록 ‧ 평가된 김우철 시 작품을 통해 체제 변화에 따른 문학사 서술 변화를 살펴보았다...
[학술논문] 북한 체제형성기 농업수리화 정책에 관한 고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해방공간에서 북한 지역의 수리불안전답이 80%에 달한다는 주장은 정치적으로 축소 및 은폐된 수치였다. 둘째, 체제형성초기 북한의 농업수리화 정책은 수년간 누적되고 지연되면서 계획했던 목표의 상당 부분 달성하지 못했다. 셋째, 1960년 기준 98%의 관개면적 완성에도 생산량은 1949년 수준에 머물러 관개개선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넷째, 통계의 상당 부분은 부정확성, 부족한 통계수치, 수치조작, 과도한 목표와 성과 부풀리기 등의 오류들이 나타났다. 다섯째, ‘8월종파사건’을 계기로 과도한 정책목표가 수립되면서 목표달성과 거리가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종합하면 북한의 체제형성기 농업수리화 정책은 제한적인 성과에 그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학술논문] 휴전후 북한주재 소련대사의 활동 - 소련의 영향력과 김일성권력의 자율성
6.25전쟁 휴전에서 1956년 ‘8월 종파사건’에 이르는 시점은 북한권력 역사상 최대의 정치적 변동을 겪었던 시기로 평가된다. 본 연구는 북한체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소련의 역할을 주목하고, 이 역할을 북한 현지에서 수행한 소련대사들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1953년 4월부터 1956년 6월까지 소련대사는 김일성을 비교적 자주 만나 면담을 하는 유일한 외국 대사였으며, 소련공민 출신 인사와의 면담을 통해 북한 내정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북한지도부와 정책을 조율하는 것이 소련대사의 주요 활동이었다. 휴전 이후 소련의 경제원조는 북한의 경제 복구에 절대적인 영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대사는 구체적인 경제문제에 개입하며 북한지도부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학술논문] 제2의 해방: 북한 자주화와 1956- 57년의 중국-북한관계
...우호적인 국제환경의 조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책 또한 이러한 중국외교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전쟁의 재발방지’와 ‘조선반도의 안정적인 현상유지’는 중국의 대북정책의 목표였으며, 이의 실현을 위하여 중국은 북한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특히 1956년 9월, ‘8월 종파사건’에 대한 중소의 공동개입은, 중•조 간의 비대칭 관계의 상징이었다. 1956년 11월 초 김일성과 비슷한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던 헝가리에 대한 소련군의 무력개입과 뒤이은 헝가리 임레나지(Imre Nagy) 정권의 붕괴는, 김일성의 불안감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이에 김일성은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유엔을 초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