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최익한의 다산연구의 성과와 한계
이 글은 일제강점기 최익한이 연재한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통해 다산연구에 대한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였다. 사회주의운동가였던 최익한이 1930년대 이후 신문글에 참여한 것은 이 시기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활동의 장이면서 생활의 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시행되었던 『여유당전서』 간행을 즈음하여 최익한은 안재홍, 정인보와 함께 다산연구에 참여하였다. 곧 1938년 12월에서 1939년 6월까지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는 글을 장기 연재하였다. 이는 다산 저작에 대해 거의 처음으로 전반적인 평가를 한 글이었다. 이를 통해 다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계점을 분명하게 짚기도 하였다. 또한 다산과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반계, 성호에 대해 ‘실학’이라고...
[학술논문] ‘茶山’의 초상과 남․북한의 ‘實學’ 전유-1950년대 최익한과 홍이섭의 정약용 연구를 중심으로-
본 연구는 식민지 시기 최익한의 「與猶堂全書를 讀함」에서 구성된 중층적인 정약용의 형상이 분단 이후 1950년대의 남북한에서 간행된 최익한의 『실학파와 정다산』(1955), 홍이섭의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 연구』(1959)로 각각 어떻게 전유되었는가를 검토한 것이다. 식민지 시기 최익한의 다산론에는 봉건제의 내부에서 모순된 질서를 재조정하려는 온건한 유교적 개혁가라는 관점과 사회주의적 경제이론을 선취한 혁명가라는 관점이 공존하고 있었다. 1950년대 분단과 냉전의 사상지리 속에서 발간된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최익한은 이전에 만들었던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파의 계보를 보다 정교화했다. 그는 서경덕-이율곡-실학파로 이어지는 ‘기(氣)철학’의 계보를 주조하였으며...
[학술논문] 홍기문의 연암 작품 번역 성과에 대하여
이 논문에서는 홍기문이 북한에서 간행한 4종의 연암 작품 선역집을 서지학적 측면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아울러 연암 문학에 대한 그의 논의도 살펴보았다. 최익한과의 공역인 『연암 작품선집』(1954)은 『방경각외전』 전부와 연암의 일반 산문들을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로 선역한 책으로 선구적 의의가 있다. 『연암 박지원선집』(1956)은 『연암 작품선집』을 재간행하면서 번역문을 일부 수정하고 작품수를 배가하여 선역했으므로 그 개정증보판이라 할 수 있다. 홍기문의 단독 번역인 『박지원 작품집』(1)(1991)은 『박지원 작품선집』(1)(1960)을 재간행한 것으로, 여러 면에서 오류와 실수가 많아 개악된 텍스트라 판단된다. 따라서 홍기문 역 연암 선집의 정본은 『박지원 작품선집』(1)이라고 하겠다. 이 책은 상세한...
[학술논문] 월북 이후 최익한의 학문과 집필활동
최익한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과정에서 일월회, 3차 조선공산당 등에서 조직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에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조선공산당 등의 여러 조직에서 치열하게 활동하였다. 그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를 기회로 북에 머물렀다. 그 역시 서울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평양을 중심으로 나름의 활동을 꾀했을 것이다. 북행 이후 최익한의 정치활동 관련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실제로도 정치 일선에는 거의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치활동 대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국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집필 활동을 하였다. 당시 많은 학자가 월북하였기에 북한의 학문적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그도 자신의 1930년대 작업을 이어받고, 더하여 새로운 분야로도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운동으로...
[학술논문] 남북한(南北韓)의 거울에 비친 실학(實學)과 다산(茶山)
1930년대 조선학 운동에서 부상한 ‘실학’이라는 개념은 이후 한국학계에서 확정된 정의와 용례를 가진 사전적 개념이 아니라 복잡하고 다양한 기대와 원망(願望)이 투영된 중층적 현상을 구성해왔다. 이는 남한보다먼저 관련 연구에 집중했던 북한도 마찬가지다. 이 연구는 일제 강점기와해방 직후 남북한 학계가 각자의 목적과 지향에 따라 형성되었던 ‘실학’과‘다산’ 독해에 담긴 모종의 문법을 재검토해보려는 시도이다. 우리는 특정시기 역사적;사상적 조건에서 실학과 다산에 부여되었던 초과적 원망과 기대들을 해소했는가? 조선학 운동 시대 사상의 준거이자 지향이었던 국가를회복하고 지적 주체의 위상을 회복했던 남북한 학계는 조선학 운동이 남긴부채를 해결했는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