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군사]
...style="color:#80888a">항미원조 전쟁은 외세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는 민족주의 전쟁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을 발휘하여 미 제국주의로부터 ‘계급의 형제’인 북한을 돕는 ‘국경 밖’의 전쟁이었다. 이러한 항미원조의 특수성으로 인해, 전쟁의 비극을 극대화하고 전투원 인민지원군의 전의를 고무하고 격려하는 ‘타자’의 역할, 즉 전쟁의 수난자는 ‘중국/여성’이 아닌 ‘북한/여성’이 담당했다. 이에 따라 항미원조 문예 속 북한은 대부분 유일한 ‘보호자/남성’인...
[정치/군사]
개전전야와 전쟁발발에서부터 정전조인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 기간 동안 김일성-모택동-스탈린 간 주고받은 ‘공개·미공개’ 암호전보와 극비서한 등 총504건을 날짜별 시간 순으로 짚는 모음집이 국내 처음으로 나왔다.
‘항미원조’로 출병을 결단, 압록강을 건너는 모택동과 김일성의 남침을 용인한 스탈린의 의중을 무엇이었을까.
한국전쟁 당시 이 세 명의 정책결정자들 간에 오고간 기밀문건들을 통해 국내에 그동안 간헐적 공개에 그쳤던 중국과 소련의 한국전쟁 관련 정책결정 과정과 내막을 사안별 집중적으로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도대체 왜, 한국전쟁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걸까?
소련 기록보관소와...
[정치/군사]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이권 다툼이라는 시선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저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전쟁 속 잔인한 살육과 그것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범인류적 문제로 끌어온다. 이를 통해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휴머니즘을 고수한다.
1970년대 이전,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줄곧 ‘항미원조전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세계화의 측면에서 한국전쟁을 회고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한반도,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각종 난제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되고, 인류가 함께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인류의 공통된 인식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학술논문] 냉전 초기 중·북 문학 교류의 한 장면 - 바진과 이예의 전장 기록에 나타난 이태준 -
1952년은 냉전의 심화와 한국전쟁의 장기화로 동아시아 전체가 이념과 무력 충돌의 긴장 속에 놓여 있던 시기로,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를 국가적 구호 로 내세우며 북조선과의 정치·군사·문화적 연대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중국 문학계는 ‘공산주의 국제주의’의 이념을 수행하기 위한 문화 실천의 일환으로 북조선 현장 체험과 기록을 장려했고, 이때 바진(巴金)은 대표적인 문학인으로서 두 차례 북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바진은 이미 ‘격류 3부작’을 통해 중국 현대문학의 중심 작가로 자리매김했으나, 1950년대 초중반의 정치적 전환기에 접어들며 ‘개인주의적 감상주의’나 ‘공상적...
[학술논문] 감정에서 스펙터클로: 1980~90년대 ‘항미원조(抗美援朝)’ 영화의 기억 정치와 서사 전환
1980년대 초의 ‘항미원조’ 영화는 문화대혁명 이후 개인의 감정과 윤리를 회복하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기존의 집단 영웅주의와 계급 투쟁 서사를 넘어서는 감정 중심의 도덕 서사를 시도하였다. <심현(心弦)>(1981)과 <심령심처(心靈深处)>(1982)는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개인의 내면, 선택, 책임, 윤리의 문제를 전면화하면서, ‘항미원조’ 전쟁을 개인감정의 차원에서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여전히 감정의 귀속처를 공동체 윤리와 국가 정당성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 또한 분명히 노출되었다. 이후 1983년부터 1991년까지의 10년은 ‘항미원조’ 영화가 텍스트로 실종된 기억의 공백기였다. 이 시기의...
[학술논문] 전쟁의 정치적 변용 - 50~60년대 ‘항미원조’ 전쟁영화를 중심으로 -
이 논문에서는 1950~1960년대 ‘항미원조’ 전쟁영화를 대상으로 중국에서 한국전쟁이 재현되는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신중국의 냉전문화 구성 과정 및 그 균열지점을 짚어보았다. <상감령(上甘岭)>·<기습(奇袭)>·<영웅의 아들딸(英雄儿女)>은 항미원조 전쟁을 다룬 ‘17년 시기’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제작년도(1956년, 1960년, 1964년)의 사회적 동향을 반영하여 각각 상이한 각도에서 대중정치를 작동시키는 방식을 보여준다. 동일한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기억하는 주체에 따라 전쟁의 양상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한국전쟁은 1차적 당사자인 남․북한 외에도 미국과 중국, UN 연합국이 참여한 국제전으로서 각국에서...
[학술논문] 중국의 ‘抗美援朝’ 전쟁과 周恩來
...People’s Volunteers)이 참전하면서 ‘抗美援朝戰爭’으로 명명하였다. 당시 ‘抗美’는 ‘保家衛國’이라는 애국주의 구호이고, ‘援朝’는 위험에 처한 형제나라 ‘조선’을 도와준다는 국제주의 구호이다. 그런데 항미원조전쟁은 조국 방어와 조선을 돕는 전쟁을 넘어, ‘인민해방군의 현대화 건설, 국내경제건설, 대중동원, 애국주의 정신, 중국의 대국지위’ 등 정치․외교․군사적으로 중요한 주제와 관련되며, 사회 각 방면의 인적․물적․사상적 지원 하에 추진된 총력전의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전방위적인 항미원조를 책임 지도한 사람은 바로 총리이자 외교부장이며, 중앙군사위 부주석인...
[학술논문] 중공군 포로의 송환거부를 통해 본 참전의도 연구
...필요성이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대외적으로 ‘항미원조(抗美援朝)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6.25전쟁에 참전하였으나,그 이면에는 동북지역(조선족,만주족,친일세력 등)과 양자강 이남지역(국민당 세력,친자본주의 세력 등)의 제거대상을국가안보의 방패막이로 전쟁에 이용한 결과가 포로 송환거부 등을 통해 나타났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팔로군 구성,국공합작 등에서 보여준 것처럼 힘이 약할 때는통일전선전술을 이용하여 힘을 기르며,주도권을 장악한 후에는 상대방을 제거하는 전략전술을 구사하였다.아울러 공산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사람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등 인명을 경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한․중 역사관계와 중국고전의 다양한 사례를 적용하여 시대상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