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젠더로 보는 냉전의 스포츠─올림픽 경쟁과 북한 여성 선수들에 대한 남한의 언론 보도
...냉전과 젠더의 교차적 작용을 살펴본다.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당시 뛰어난 기량을 보인 북한 여성 선수들에 대해 젠더화된 비난을 쏟아냈다. 이는 북한 여성 선수의 신체적 특징, 태도를 거론하며 그녀의 ‘여성성(femininity)’을 공격하거나, ‘정상적 성(normative sexuality)’의 범주에 맞지 않는 ‘중성’으로서 여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식이었다. 이 글에서는 스포츠에서 성과 젠더가 작동해 온 오래된 역사와 함께 1950년대부터 미국이 사회주의권 여성 선수들에 대해 강하게 제기해 온 성 정체성 의혹 등을 다루면서, 이러한 맥락 속에서 한국이 북한과의 스포츠 경쟁에서 젠더 논의를 이용하는 방식과 그 주장의 이면에 대해 분석했다.
[학술논문] 북한산성의 승영사찰僧營寺刹 ― 사찰의 역할과 운영을 중심으로
...이들 각 사찰에 주목하여 사찰의 위치와 역할, 운영 등을 비롯해 그것의 위상과 불교사적 의미 등을 살펴보았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조선후기 북한산성이 갖는 중요성과 함께 승군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작업으로 보인다. 산성의 방위를 위해 승군이 주둔한 승영사찰은 3군영三軍營의 담당구역 내에 건축된 3대문大門‧3소문小門‧7암문暗門‧중성重城의 인근에 위치하여 대부분 성곽의 수비를 담당했다.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의 상운사‧서암사‧진국사 등은 북문北門을 중심으로 하여 산성 북쪽을, 금위영禁衛營 소속의 보국사‧보광사‧용암사‧태고사 등은 대동문大東門(현 대성문)을 중심으로 하여 산성 동쪽을, 그리고 어영청御營廳 소속의 국녕사‧원각사‧부왕사 등은 대서문大西門을 중심으로 하여 산성 서쪽을 방어했다....
[학술논문] 『中國歷史地圖集』의 戰國時期 燕 長城 고찰
『中國歷史地圖集』에 제시된 燕 長城을 검토하였다. 특히 한반도 중북부지역까지 연결시킨 연 장성의 실체를 분석하였다. 燕 長城은 요하이동지역에서 고고학적으로 그 구체적인 실체를 밝혀내기에는 그 근거가 충분치 않다.『地圖集』에 제시된 요동지역, 한반도지역의 燕 長城 노선은 당시의 사료에 나타난 상황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당시 사료에 障塞, 障으로 기록된것을『地圖集』에서는 長城이라고 해석하고 이를 표기하였다. 하지만 이와같은 해석은 무리가 있다. 장성과 장새, 장은 당시에 다른 개념으로 인식 사용되고 있었다. 『地圖集』에 구체적으로 제시된 燕 長城 노선도에 문제가 있다. 고고학적인 근거가 전혀 뒷받침되지 않았다.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중북부지역까지 연결시킨 燕 長城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학술적인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학술논문] 북한지역 고인돌유적의 특징과 성격
본고는 최근의 연구성과에 근거하여 북한지역 고인돌의 구조적 특징과 형식별 분포관계를살펴보고 나름의 편년과 획기를 마련하여 이지역 고인돌의 단계별 특징 및 성격을 고찰하고자작성되었다. 북한지역고인돌의출현과확산과정은中國遼東지역과연계하여 살펴보아야한다. 대동강하구의 서해안지역에서는 기원전 13~12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 탁자형고인돌이 축조되는데,고인돌의 구조는 물론 출토유물상에 있어 동시기 遼東半島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양자는동일한계통의사람들이축조한것으로볼수있다. 개석형고인돌은太子河流域의馬城子文化가 주변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 중 요동반도의 고인돌문화와 접촉하여 출현한 것으로이해하였다. 가장빠른연대를보이는것이鳳城東山유적에서확인되며커다란덮개돌밑으로토광형의묘실을두었고, 그내부에서는 마성자문화후기단계의전형적인토기가
[학술논문] 조선민주청년동맹의 결성 배경 연구: 소련의 영향을 중심으로
...집행위원회 서기국 회의는, 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의 임무를 ‘공산주의적 청년조직을 근로청년의 광범한 대중조직’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반파시즘적 대중단체를 표방한 코민테른의 청년동맹 정책은 1930년대 이후 입국한 일부 소련 공산대학출신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협력하에, 해방 이후 소군정과 함께 입북한김일성의 주도로 실천되었다. 결성 초기부터 공산주의 성향을 드러내었던 소련의 콤소몰과는 달리, 대중성을 표방한 민청은 공산주의 청년활동가들을 주축으로 했으나 원칙적으로 모든 청년층에 개방되었다. 민청의대중성은 이후 북한의 청년동맹이 모든 청년을 포괄하는 최대 규모의 사회단체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반면, 당과 민청의 직접적 지도 관계가 공식화되는 것을 지연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