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타민족을 가둔 곳이 아니라 같은 언어와 같은 핏줄의 동족을 서로 감시하고 억압하는 수용소였다. 그래서 모멸은 더 깊었다. 어릴 적 소꿉친구가 보위원이 되어 죄수 앞에 서고, 장본인이 죽어야 연좌제로 함께 끌려온 가족이 풀려나는 제도 속에서 친족의 살인까지 벌어진다. 자기 언어가 무기가 되고, 자기 피가 족쇄가 되는 곳. 그 역설적인 상황이 이 책의 심장을 이룬다.
그럼에도 『캠프 15』는 단순히 어두운 기록이 아니다. 16살 소년 도성진의 눈으로 본 수용소는 공포와 절망 속에서도 해학과 인간성이 꺼지지 않는 무대다. 죄수들은 웃음으로 버텼고, 농담으로 공포를 비틀었다. 이 책은 공포와 눈물을 짜내는 고발문학이 아니다.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의 유머와 연대, 사랑과 우정을 더 감명 깊게 보여준다.
[사회/문화]
...타민족을 가둔 곳이 아니라 같은 언어와 같은 핏줄의 동족을 서로 감시하고 억압하는 수용소였다. 그래서 모멸은 더 깊었다. 어릴 적 소꿉친구가 보위원이 되어 죄수 앞에 서고, 장본인이 죽어야 연좌제로 함께 끌려온 가족이 풀려나는 제도 속에서 친족의 살인까지 벌어진다. 자기 언어가 무기가 되고, 자기 피가 족쇄가 되는 곳. 그 역설적인 상황이 이 책의 심장을 이룬다.
그럼에도 『캠프 15』는 단순히 어두운 기록이 아니다. 16살 소년 도성진의 눈으로 본 수용소는 공포와 절망 속에서도 해학과 인간성이 꺼지지 않는 무대다. 죄수들은 웃음으로 버텼고, 농담으로 공포를 비틀었다. 이 책은 공포와 눈물을 짜내는 고발문학이 아니다.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의 유머와 연대, 사랑과 우정을 더 감명 깊게 보여준다.
[학술논문] 都城의 築造過程에 대한 檢討 -高句麗 平壤城(長安城)과 漢陽都城의 축조를 중심으로-
도성의 구조면에서 고구려 평양성은 산성을 끼고 형성된 平山城으로 複郭式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평지 宮城과 입보용 山城을 결합한 전기 평양성의 형태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고려의 도성인 開京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양도성에서는 이보다 한층 발전하여 도성의 성벽이 궁성과 시가지 전체를 두르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 때문에 한양도성은 肅宗 때 入保用 山城인 北漢山城을 쌓아야만 하였다. 도성의 축조과정 면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은 궁궐, 궁성(내성), 시가지를 두른 외성 순으로 축조되었으며, 한양도성은 궁궐, 성곽, 궁성 순으로 축조하여 궁성보다 시급한 성곽을 먼저 축조하였다. 이처럼 新都의 건설에서는 왕의 居所인 王宮이 먼저 축조되게 마련이었다. 신도의 위치가 정해지면 한양도성처럼 먼저 宮闕...
[학술논문] 건축적 관점에서 본 발해유적에 대한 한국의 연구동향
...③ 발해유적 총론 ④ 발해 성곽·도성·궁전유적 ⑤ 발해 사찰유적 ⑥ 발해 살림집유적 ⑦ 발해 24개돌유적 ⑧ 영광탑을 비롯한 발해 전탑유적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연구주제 가운데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① 발해유적에 대한 각 국가별 연구사였다. 중국 측 연구사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북한이었다. 중국과 북한이 대부분의 발해유적을 점유하고 있고, 유적 접근도 쉽지 않아 유적의 현황 파악을 위해서는 두 국가의 선행연구 검토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많이 연구된 주제가 성곽과 도성유적이다. 다른 유적에 비해 형태와 구조적 특징 파악이 비교적 무난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궁전유적에 대해서는 아직 초보단계에 있다. 최근 발해의 도성유적 발굴이 끝났고 발굴조사보고서도 속속 나오고...
[학술논문] 龍岡黃龍山城과 黃海∼大同江沿岸路- 고구려 후기 王都방어체제의 一例-
북한 평안남도 용강군 烏石山을 중심으로 장대한 성벽을 남기고 있는 黃龍山城은 둘레길이 6.6km의대형산성으로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구려 성곽이다. 충분한 거주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 더하여 평지로부터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한 구조로 보아 인근 주민의 입거성을 중시하여 축조한 성곽으로 보인다. 과거 樂浪郡시기 蟬縣이었던 이 지역을 차지한 고구려는 황룡산성을 축조하여 새로운 지방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축조방식으로 보아 황룡산성은 고구려 중후기 산성의 특징을 띠고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에 더하여 황룡산성은 지역 방어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황해∼대동강 연안로를 끼고 있는 지리적 위치에 더하여 인근에 여러 성곽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牛山城·東津城·勒鳴山城·保山城등이
[학술논문] 證道歌字와 「東國李相國集」
이 연구는 「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찍었던 고려활자와 관련된 계속 연구로 이미 알려져 있는 分司大藏都監에서 간행된 「東國李相國集」 全集의 版本도 그 底本은 證道歌字로 찍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내용이다. 더 나아가 「東國李相國集」 全集을 찍는데 사용된 활자의 글씨와 證道歌字가 같다면 기존에 추정되었던 여러 가지 사실중 「古今詳定禮文」은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여 찍은 것이 아니며 소위 「證道歌」, 「詳定禮文」, 「李相國集」이 10여년 이내에 같은 활자로 찍었고 활자 역시 開城에서 주조되어 江華島 遷都 때 함께 가지고 가서 책의 출판에 사용하다가 1270년경 다시 還都할 때 돌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배경과 근거를 제시하였다. 한편 많은 양의 실물활자들이 나타남에 따라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복’자나
[학술논문] 북한강 유역 신라 郡縣의 형성과 구조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신라 中古期의 지방 제도는 郡-城⋅村制로 아직 縣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통일기 郡縣制로의 전환 과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신라는 진흥왕 12년(551) 고구려를 공격하여 북한강 유역을 포함한 ‘10郡’의 땅을 차지하였다. 즉 郡을 설정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이 지역 군현 중심지에 남아 있는 신라 城址를 통해서 주요한 지점에 城을 축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城은 군사적인 필요에 따라서 더 두어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郡은 일정한 면적과 호구수를 고려하여 설정된 것으로 파악된다. 양자는 다른 기능의 것이었지만 결국 효율성의 차원에서 郡 내의 각 城이 군의 영역을 분할하여 郡(중심 城) 또는 縣으로 전환, 郡縣制가 성립한 것으로 이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