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재일조선인 ‘북송문제’와 일본인의 ‘귀국협력’ - ‘일조우호운동’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재일조선인들의 북한으로의 집단적 귀국(북송) 이 “어떻게 일본사회에 폭넓은 지지 속에 이루어질 수 있었나?”. 본고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일본 혁신운동의 아젠다로서의 북송문제를 다룬다. 특히 일본인들의 귀국협력운동이 안보투쟁을 매개로 한 일본 혁신운동의 연장이자, 북한이라는 요소와 밀접히 연관된 국제적인 연대운동이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다. 통일전선운동으로서 귀국협력운동은 북한의 대일정책(접근), 또는 통일전선 전술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북한과 일본혁신운동 간의 연대는 일조협회를 중심으로 한 일본 혁신계의 일조우호운동이라는 형태로 존재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귀국협력운동은 북일 ‘인민연대’를 고양시켰다. 일조협회 귀국협력운동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학술논문] 북한의 대일접근과 재일조선인 ‘북송(귀국)문제’
본고는 ‘북송문제’를 북한의대일정책의 연속과 변화라는 차원에서 그의미를 재론한다. 북한이 재일조선인들의집단적 귀국을 추진(1958년)한 것은, 단지 한국과 일본 간의 관계를 이간시키는것에 있지 않았다. ‘남일 성명’ 발표(1955년)이래, 북한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목표로 적극적인 대일인민외교를 펼쳐왔었다. 이는 조총련을 거점으로 한 재일조선인 운동과 일조협회를 매개로 한 혁신운동을 양 대축으로 삼고 있었고, 한일회담이 긴 공백기에 있는 동안, 상대적으로큰 성과들을 보여 왔었다. ‘집단적 귀국결의’는 이 성과들이 한일회담의 재개로 인해 급격히 후퇴하자, 북한이 극적인 국면전환을 시도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즉,북한은 대일 인민외교의 양대 축을...
[학술논문] 중동 시민혁명이 북한 민주화에 주는 시사점: 민주화 지원과 정보기술 효과를 중심으로
본고는 ‘북송문제’를 북한의대일정책의 연속과 변화라는 차원에서 그의미를 재론한다. 북한이 재일조선인들의집단적 귀국을 추진(1958년)한 것은, 단지 한국과 일본 간의 관계를 이간시키는것에 있지 않았다. ‘남일 성명’ 발표(1955년)이래, 북한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목표로 적극적인 대일인민외교를 펼쳐왔었다. 이는 조총련을 거점으로 한 재일조선인 운동과 일조협회를 매개로 한 혁신운동을 양 대축으로 삼고 있었고, 한일회담이 긴 공백기에 있는 동안, 상대적으로큰 성과들을 보여 왔었다. ‘집단적 귀국결의’는 이 성과들이 한일회담의 재개로 인해 급격히 후퇴하자, 북한이 극적인 국면전환을 시도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즉,북한은 대일 인민외교의 양대 축을...
[학술논문] 사할린한인 귀환문제에 대한 전후 일본정부의 대응
...귀환이 실현됨으로써 해묵은 억류자 귀환문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상기 2번의 귀환교섭 과정에서 한인의 귀환은 여전히 미제 사안으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국적 등의 명분으로 포장된 혈통에 따른 차별적인 귀환교섭, 그리고 재일동포와 사할린 한인 등 1952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로 일본국적을 상실한 ‘비일본인’을 일본영토에서 추방하거나(북송사업) 새로 들이지 않겠다는 차별의식의 결과로서, 이것은 1960-1970년대 일본정부의 정책 방침을 규정하는 토양이 되었다. 1965년 한일조약 체결 후 한국정부가 또 다른 외교교섭 주체로 등장하자 일본정부는 ‘귀환자의 한국정착 보장과 한국정부의 귀환비용 부담’을 전제로 소련과 한인의 귀환문제를 교섭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1972년...
[학술논문] 탈식민의 원칙과 현실―북한의 한일회담 비판
...침략의 일환이라고 경계했지만, 식민지배 청산에 대한 의식은 아직 옅었다. 1954년 제네바회의와 1955년 반둥회의로 이어지는 국제적 평화공존 흐름 속에 북한은 일본과 무역 및 문화교류 확대를 꾀했다. 북일 접근은 계속되어 1959년 12월부터 재일한인의 북송/귀국이 이루어진다. 장면 정부와 박정희 정부에서 한일회담은 크게 진전되었다. 한일회담은 탈식민의 원칙이 냉전 격화라는 현실과 타협한 결과였다. 북한은 박정희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한일회담 비법·무효론을 폈다. 탈식민이라는 관점에서는 한일회담의 현안 문제를 놓고 남북한 사이 의제의 동조화가 엿보인다. 1990년대 북일회담은 식민지배 사과와 배상을 둘러싸고 1965년의 한일협정, 그리고 그 이후 한일 교섭의 형식과 범위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