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한말 의병전쟁 연구와 기념사업의 현황과 과제
... 인물의 현창사업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지역 단위또는 의진 단위의 기념사업도 추진되었으면 한다. 또한 자료 수집과 유적지 조사 등을 종합적으로 시행하고, 장기 계획을 수립하여 의병전쟁자료집을 간행해야 한다. 의병전쟁에 대한 교육과 홍보, 문화행사 등도 주요한 기념사업이다. 이러한 사업을 종합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의병전쟁 전문 연구기관의 설립이 요구된다. 무명의병에 대한 관심과 기념사업도 필요하다. 의병전쟁 중에 희생된 의병의 대부분이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의병이다. 이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기념사업이 절실하다. 국가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보루이다. 국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입지 못한 의병들은 국가를 지키고자 무력한 국가를 대신하여 일제와 항전하다 희생되었다. 이들의 희생을...
[학술논문] 1960년대 후반 북한의 갑산파 숙청과 유일사상체계 형성에 관한 재고
...파격은 아니었다. 둘째, 「일편단심」이라는 작품이 박금철에 대한 아내의 수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검토 결과 「일편단심」은 갑산파와는 관계 없는 지방 연극단의 창작극으로, 혁명 과업에 대한 한 여인의 헌신을 그린 작품이었다. 셋째, 갑산파가 리효순의 동생 리제순 전기를 출판함으로써 갑산파의 항일투쟁을 부각시키고 유일혁명전통을 훼손하려 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 책은 다른 혁명전통 교양서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유일적 지도와 그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출판물이었다. 넷째, 1960년대 조국광복회 기념사업은 혁명전통의 다원화를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닌 항일혁명전통 교양의 일환이었다. 종합적으로 볼 때 갑산파가 북한 유일혁명전통 확립에 반대하였다는 기존의 통념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학술논문] 최익한의 다산연구의 성과와 한계
이 글은 일제강점기 최익한이 연재한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통해 다산연구에 대한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였다. 사회주의운동가였던 최익한이 1930년대 이후 신문글에 참여한 것은 이 시기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활동의 장이면서 생활의 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시행되었던 『여유당전서』 간행을 즈음하여 최익한은 안재홍, 정인보와 함께 다산연구에 참여하였다. 곧 1938년 12월에서 1939년 6월까지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는 글을 장기 연재하였다. 이는 다산 저작에 대해 거의 처음으로 전반적인 평가를 한 글이었다. 이를 통해 다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계점을 분명하게 짚기도 하였다. 또한 다산과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반계, 성호에 대해 ‘실학’이라고...
[학술논문] 5・18민주화운동 관련법의 성과와 한계: 5・18진상규명법 제정의 필요성과 방안
5・18문제해결의 5대원칙이라 할 수 있는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 배상, 기념사업과 관련하여 헌정질서파괴범죄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1995. 12.21.),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1995.12.21.),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0.8.6.),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2002.1.26.)이 제정・시행되었다. 이러한 5・18관련법들의 제정・시행으로 검찰의 기소에 의한 5・18책임자처벌과 진실규명, 5・18희생자에 대한 보상, 5・18관련자를 민주유공자로서 예우함으로써 명예회복 등 일정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발포책임자, 헬기기총소사, 민간인 학살, 집단암매장 등 밝혀지지 않은 중요한 사안들이 남아 있으며, 나아가...
[학술논문] 해방 이후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 현황과 방향 제언
...순국한지 11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지만, 그의 유해 발굴은 국내외적인 여건의 변화와 체계적인 준비의 부족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의 목적은 해방 이후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안중근의 유해 발굴 현황을 추진 형태별로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해 발굴의 방법과 방향을 제안하는 데 있다. 해방 직후 혼란의 와중에서도 안중근에 대한 추모와 기념사업이 거행되면서 점차 유해의 발굴과 봉환이 촉구되고, 1948년 남북협상 당시 김구가 김일성에게 안중근의 유해를 봉환하자고 제의하고 안중근의 조카인 안우생을 북한에 머물도록 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이어 1992년 한중수교 전후 정부 차원에서 유해 발굴과 매장지 조사에 대한 교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남북한이 공동으로 추진할 경우에 협조하겠다는 중국의 답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