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북한도 세뱃돈 받네…이동권 제한에 고향보단 식당으로
북한 주민도 남쪽과 마찬가지로 민족 대명절인 설을 쇠지만, 사회주의식으로 계승·발전한 '우리식 명절'을 내세우고 있어 그 의미는 남한과 조금 다르다.
북한은 일제 해방 이후 민속 명절을 봉건 잔재로 간주한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설과 추석을 명절로 취급하지 않았다.
[뉴스] 북한, 통일 지우기 계속…남북정상회담 기념우표도 싹 사라져
북한의 통일 흔적 없애기가 이어지고 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업적과 군사적 성과 등을 선전할 목적으로 발행하는 기념우표에서도 남북 교류를 상징하는 흔적들이 지워졌다.
[정치/군사]
...오해하듯 북한이 ‘친일 청산’을 완전히 해낸 것은 아니었다. 북한 정권 내부에도 일본군이나 헌병 보조원 출신 인물들이 요직에 올랐다. 홍명희, 김달삼, 김영주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과거는 문제 삼지 않았고, 오히려 친일파 논쟁은 남한에 집중되었다. 북한은 소련의 막대한 지원금을 경제 발전이 아닌 김일성 우상화에 쏟아부었다. 전국 곳곳에 김일성 연구실과 기념물이 설치되었고, 관리 비용만 전체 예산의 40%를 차지했다.
해방된 한반도에서 소련식 공산주의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는 정면으로 부딪혔다. 남한에서는 박헌영이 ‘8월 테제’를 발표하며 인민공화국 수립을 외쳤다. 문서의 마지막 구호는 “스탈린 동무 만세”였다...
[사회/문화]
...연혁과 조직체계, 역할을 다룬다. 초기 사회안전성이 토지개혁, 농업협동화, 국유재산화, 성분제도 등 정권의 중요정책을 관철시키는 역할을 하였음을 밝힌다. 이어, 사회안전성의 역할과 업무, 방향을 제시하는 ‘인민보안법’과 ‘인민보안단속법’ 등 기본 법제를 검토한다. 4장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 시기 사회안전성의 주민통제 특징과 역할을 분석한다. 김일성 시기 사회안전성 주민통제의 특징으로 사회통제의 제도적 기반 조성, 집단주의에 따른 통제, 체제질서 유지를 위한 공포통제를 도출한다. 김정일 시기 사회안전성의 주민통제의 특징으로는, 사회통제 법적 기반 조성, 비사회주의 행위통제의 시작, 계획경제 실패와 외부문물 유입 통제를 위한 공포통제를 도출한다.
5장에서는...
[정치/군사]
...이은 주류세력과 국내 민족주의자들이 결집하여 있었다. 김일성의 회유를 물리치고 남으로 내려온 김구, 6·25전쟁에 참전한 김구의 아들 김신(공군참모총장), 임정 최고의 이론가 조소앙, 국회의장 신익희, 부통령 이시영,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안재홍, 광복군사령관 지청전,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 미군정 통위부장 유동열,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진보주의자 조봉암, 부통령 김성수, 제헌의회 헌법기초위원장 서상일 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북한의 서북(평안도·황해도·함경도)에서 남으로 내려온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도산 안창호의 후예들로 해방 이후 백만명, 전쟁 시기 수십만 명의 인원이 남하하여 반공 민족주의, 근대화 세력, 반독재 투쟁 세력이 되어 대한민국의...
[통일/남북관계]
... 5월 14일 팔레스타인에 제2의 건국을 이룬 것을 높게 평가하고,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얼 이 살아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보다도 긴 4357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배달민족이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을 애통해한다. 남북한 이데올로기의 기저를 이루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 밖에도 북한에서 마르크스주의마저 포기하고 김일성 주체사상에 입각한 3대 세습 체제가 구축된 것을 통렬하게 비판한 다. 아울러 남한이 채택한 자본주의 역시 극심한 양극화로 인 해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두 번째 글, 「KOREA 이데올로기는 공포다」라는 논문에서는 분단 체제가 고착화 되는 과정에서 남북의...
[통일/남북관계]
...대중운동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북한은 소련 주도의 ‘통합경제’노선이 경제적 자립을 저해한다고 판단하여 자립경제 건설노선을 고수했다. 1964년 “평양선언”을 통해 소련의 원조를 비판하고 자력갱생에 의한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을 주창했다. 논문은 북한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원조의 제공자와 수용자 간 관점 차이를 강조한다.
김서경은 1967년 전후 김일성이 유일 지배 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정치와 교육이 어떤 역학 관계를 가지는지 분석한다. 1967년을 기점으로 교육 정책 및 교육 내용의 변화점 분석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유일 지배 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해 교육을 활용했는지 연구했다. 더불어 갈등 이론에 의거하여 공교육을...
[학술논문] State Ideology and Language Policy in North Korea: A Critical Discourse Analysis of North Korea’s Print Media
북한의 언어정책은 김일성의 주도로 60년 넘게 체계적이고 성공적으로 진행돼 왔다. 언어정책의 통일성과 그 규모로 볼 때 북한은 세계 언어정책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다. 이 연구는 북한 언어정책의 이런 성공에 북한 언론의 역할이 크다고 보고, 특히 북한 신문이 언어 정책 및 언어에 관한 사상을 지면을 통해 어떤 내용과 방법으로 전달했는지를 비판적 담화분석과 코퍼스를 이용해 분석했다. 연구방법으로는 1998년부터 2004년 사이에 발간된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의 네 가지 신문으로부터 구축된 코퍼스 자료에서 '언어'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신문기사가 어떤 주제를 전달하는 지를 범주화했다. 분석 결과, 검색어 ‘언어’와 관련해서 ‘단일민족-단일언어 사상’이...
[학술논문] 북한의 소련영화 수용과 영향 1945~1953
...국가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소련영화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본 연구는 초기 북한국가와 북한영화 형성과정에서 소련영화의 수용과 영향을 당대 신문, 잡지의 담론을 활용한 실증적 접근을 통해 규명한다. 첫째, 북한 인민들의 소련영화 수용을 통해서는 ‘해방군’ 소련에 대한 무한한 감사, 발전과 번영의 소련 이미지를 통한 미래 전망의 상상을 살펴본다. 둘째, 소련의 스탈린주의 문예이론이 북한영화에 끼친 영향을 탐구한 선행연구들에 기반을 두면서도, 실제 북한영화에 끼친 소련영화의 영향이 절대적이지는 않았음을 <내 고향>(1949)에 대한 담론분석을 통해 거론한다. 소련영화의 영향을 부정하기보다는 김일성의 항일 민족주의라는 토착화한 문예전통이 이미 하나의 맹아로서 형성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학술논문] 990년대 이후 북한의 대중국무역의존도 실태와 특징에 관한 분석: 한반도경제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함의 및 해결과제와 관련하여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1990년대 이후 북한의 대중국무역의존도에 대한 실태와 특징을 분석하여 향후 한반도경제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함의와 해결과제를 규명하는 데에 두고 있다. 그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90년대 북한의 대중국무역의존도는 1948년부터 출범한 김일성 정권의 1990년 이후 1998년 김정일 정권의 공식 출범 직후인 1999년에 이르기까지 1993년 34.0%와 1997년 30.1%를 제외하고 30%대의 비중을 넘지 못하고 20%대 수준에 불과했다. 둘째, 2000년대에 들어와 북한의 대중국무역의존도는 2000년 24.8%에서 2001년-2002년의 30%로 증대된 후 2003년-2004년의 40%대, 2005년-2006년의 50%대, 2007년의 60%대, 2008년-2009년의 70%대로...
[학술논문] 남북대화 규범의 탄생- 구성주의 시각에서 본 1970년대 남북대화
본 논문은 1970년대 남북대화를 구성주의의 시각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구성주의는 현실주의가 포착하지 못하는 연구대상을 발견하게 해주며, 연구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설정하게 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가능하게 한다. 1970년대 남북대화는 ‘데탕트’의 흐름 속에서 한민족국가를 꾀하는 ‘민족주의’와 이산가족방문을 뒷받침하는 ‘인도주의’의 가치가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가치들은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나, 냉전적 국제정치구조가 느슨해지기 전까지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가로지르는 남북교류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우호적인 남북관계는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는 1970년대 남·북한의 관계개선이 국가 이익과정체성...
[학술논문] [연구노트]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난민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
1950년 6월 25일, 민족상잔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과거 이 전쟁에 대해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며 학계에서 논쟁이 분분했지만 냉전 후 러시아당안이 해제되면서 결국 남침으로 결론이 났다. 김일성은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지지를 얻었고 모택동의 동의도 받아 낸 것이다. 모택동이 지지한 원인은 냉전시기 같은 사회주의진영 속에서 서로 지지해야 한다는 대의도 있었지만 동북전쟁시기 중공은 북한정부의 아낌없는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공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북한난민을 중국경내에 대량으로 받아들여 안치하고 부양했다. 당시 중국도 국내전쟁이 금방 끝난 상황에서 국내경제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지만 북한난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중국경지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