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남북관계]
≪남북분열저지를위한 투쟁사≫는 1945년 8.15해방 이후 민족의 분열저지를 위한 천도교를 중심으로 남한과 북한에서 일어난 처절한 투쟁사를 기록한 구국운동의 역사서 이며 피로 쓴 백서이다. 우리 겨레는 1919년 3.1독립운동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한국에 관한 관심과 인식을 새롭게 한 결과 카이로, 포츠담 등 선언에 의하여 자주독립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얄타비밀협정에 의하여 미·소 양군이 진주하면서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열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천도교에서는 남·북 교회사에 긴밀한 연계를 취하여 1948년 3월1일을 기하여 남북통일 총선거 시행을 절규하는 시위 의거를 계획, 실행하였던 것이다. 동년 3월1일이 운동이 시작되기 직전에 기밀이 공산 당국에 탐지되어 즉각 초비상 계엄령이 북한 전역에 내려졌고...
[통일/남북관계]
...미국의 조지 H. W. 부시가 지원했다고는 하더라도 독일이 대처와 미떼랑을 설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콜은 서독의 정치적·경제적 자산을 총동원하여 초인적인 외교력을 발휘했다. 소련과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불어오는 개혁 바람이 동독 주민들에게 반체제 운동을 촉발한 기회 또한 놓치지 않으면서, 동서독 양국 간 통화·사회 통합, 통행 확대, 동독 내 총선거 등 통일을 위한 내적 토대를 쌓아갔다. “평화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 한반도 통일정책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이 책에는 국제문제 대기자로서 한반도 평화문제를 수십여년 다뤄온 저자의 관록이 충분히 녹아든 대목이 많다. 특히 “남북한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은 환상”이라며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남북한 모두 맞닥뜨린 정체된 통일논의의...
[학술논문] 냉전체제 형성기(1945~1948) 中華民國의 한국인식 - 국민당 언론의 한국 기사를 중심으로 -
...그러므로 한국분단의 본질적 책임이 미·소 양국에게 있다고 보았다. 중국 언론들은 남북분단의 원인과 책임, 반탁운동,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 남한단독선거 등 각종 현안에 관하여 다른 시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한결같이 미군정의 대한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주된 이유는 미군정이 한국의 독립운동과 임정활동을 철저히 무시한 반면, 親美의 탈을 쓴 親日세력은 비호함으로써 자주적 통일독립의 민족열망을 짓밟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남북한은 극단적 냉전구도로 굳어져 김구·김규식처럼 중도성향의 지도자들이 설자리를 잃게 되었고 민심을 잃게 된 것으로 보았다. 남한 총선거이후 중국의 한국관련 보도는 공산세력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폭로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쪽으로 전환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국공내전도 중국의...
[학술논문] 역대 한국정부의 통일방안과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통일방안구상
본 논문은 역대 한국정부의 통일방안을 통해 그 특징 및 문제점을 분석함을 1차적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남북이 분단된 이후 남한 정부의 통일방안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즉 총선거통일방안․무력통일방안→유엔감시하의 자유 총선거→남북한 자유 총선거→통일헌법에 따른 총선거→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한민족공동체건설을 위한 3단계통일방안→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반도의 통일은 진전이 없다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 이유는 첫째, 각 정부의 통일방안이 실질적인 통일을 위한 방안이라기보다 시대상황을 대변한다든지 혹은 정권연장을 위한 눈속임 정책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통일의 또 다른 주체인 북한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술논문] 해방 후 기독교세력의 동향과 국가건설운동
...이들 운동을 통해 국가건설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논의가 별 소득없이 결렬되었다. 빠르게 공산세력의 중심으로 안정되어 가는 북한에 비해 남한지역은 정치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에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통해 국가를 건설하자는 이승만세력의 단독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반발해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을 주도하다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인민민주주의노선을 수용한 김창준을 비롯한 세력은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반대하며 적극 좌우합작가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이후 북한으로 월북하였다. 대다수의 한국교회와 기독교세력은 이후 유엔 감시하 총선거에 적극 참여하였고, 건국된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등용되어 새로운 국가건설에 노력하였다.
[학술논문] 통일을 위한 역사교육 VS. 역사를 통한 통일교육
...통일정책은 1969년 빌리 브란트에 의해 신동방정책(Neues Ostpolitik)으로 부활했다. 1990년 헬무트 콜 수상에 의해 이룩된 독일통일은 아데나워의 서방과의 통합, 빌란트의 신동방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통일정책의 기본 노선은 ‘선 자유, 후 통일’에서 ‘선 평화, 후 통일’로,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에는 자유총선거에 의한 흡수통일로 바뀌었다. 독일통일 과정에 비추어 볼 때, 한반도 통일은 어느 지점에 있는가? 이승만의 ‘선 자유, 후 통일’, 박정희의 ‘선 성장, 후 통일’, 김대중과 노무현의 ‘선 평화, 후 통일’, 이명박의 ‘선 비핵 개방, 후 통일’. 이렇듯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은 언제나 통일을 후순위로 놓는 방식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학술논문] 1950~70년대 ‘사상계’ 지식인의 분단인식과 민족주의론의 궤적
...민주주의의 확보와 국민생활의 향상을 통해 공산주의가 발붙일 수 없도록 하자는 승공의 논리로 반공 독재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자유 민권 투쟁의 주체로 지식인을 호명하였다. 4ㆍ19 이후 민간 차원의 통일논의가 분출하는 가운데, 자유세계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의 물결이 밀려왔다. 그러나 사상계 지식인들은 반공 평화통일론을 고수하며, 먼 장래의 남북총선거에 대비한 남한 체제의 경쟁력 강화에 매진하였다. 그 요체는 민주주의의 물적 토대 구축을 위한 경제 근대화와 복지를 통한 사회통합에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사상계 지식인들은 기존의 자유세계론을 우회해 경제자립과 국익 우선의 경제적 민족주의 담론을 적극 개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민주항쟁 승리의 다음 단계 과제로 경제건설과 국민기강의 확립을 설정하고, 경제 일변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