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제3차 북핵 실험 이후 북한의 무력도발 가능성과 군사적 측면에서의 한국의 대응
...12월의 북한 장거리 발사 실험과 금년 2월의 제3차 북 핵 실험 이후, 북한은 핵무기 보유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 완성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전략과 함께, 선제 핵무기 기습 타격 및 서울 불바다 폭언 등을 행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위협 및 전쟁 도발 가능성을 크게 증대시켜 왔다. 여기에 필자는 월츠의 체제 접근론을 보완한 나이 교수의 전쟁 원인론에 기초하여 전쟁 발발 가능성을 분석 및 평가해 보고, 북한의 가능성 있는 전쟁도발 유형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포괄적인 대비방향을 국방정책 및 전략 측면에서 제시해 보았는데, 북한의 가능성 있는 전쟁도발 가능성을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로 극도로 악화된 한반도 위기상황은 미-중간의 양극구도 심화 및 경직성 증가와 김정은 체제의...
[학술논문] [연구노트]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난민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
1950년 6월 25일, 민족상잔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과거 이 전쟁에 대해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며 학계에서 논쟁이 분분했지만 냉전 후 러시아당안이 해제되면서 결국 남침으로 결론이 났다. 김일성은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지지를 얻었고 모택동의 동의도 받아 낸 것이다. 모택동이 지지한 원인은 냉전시기 같은 사회주의진영 속에서 서로 지지해야 한다는 대의도 있었지만 동북전쟁시기 중공은 북한정부의 아낌없는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공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북한난민을 중국경내에 대량으로 받아들여 안치하고 부양했다. 당시 중국도 국내전쟁이 금방 끝난 상황에서 국내경제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지만 북한난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중국경지역에...
[학술논문]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원인에 관해서, 미군이 38선을 넘어 중국의 안전을 위협했기 때문에 중국이 참전하였으며, 중국은 한국전쟁 초기에 파병에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이 서방학계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중국계 학자들은 마오쩌둥이 참전에 결코 소극적이지 않았으며, 반대로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파병에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최근 공개된 중국의 당안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 마오쩌둥이 한국전쟁개시에는 동의하였지만, ‘미군이 개입할 경우에도 38선을 넘지 않는다면 중국은 파병하지 않는다’며 파병에 소극적이었고, 이 태도를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제7함대의 대만해협 파견발표 이후까지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엔군의 전면적인 참전 이후 더욱 악화된...
[학술논문] 한국전쟁 이전 소련의 북한 공군지원 고찰(1945∼1950)
한국전쟁 당시 북한공군은 개전 3개월도 못 되어 완전히 궤멸되었다. 이것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미 공군의 조기참전을 들 수 있다. 그러나한편으론 광복이후부터 소련의 지원으로 양성된 북한공군의 전력이 왜그토록 미약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본 연구는 개전 초기 북한공군의 궤멸원인을 1945∼1950년소련의 북한 공군지원에서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 시기 소련의 공군지원을 시기와 분야별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1949년 3월 김일성과 스탈린의 모스크바 회담 이전까지 소련의 지원은 대단히 미약했으며, 전쟁발발 시점에 임박해서야 양적증가를 보이지만, 이 또한 매우 소극적으로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전 초기 북한공군은 남한공군과 비교할 때 10배의 양적 우위에 있었지만...
[학술논문]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원인 연구 : “국방선(國防線)”의 무혈확장
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제7함대 대만해협 파견 발표는, 신생(新生)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흔들었다. 이에 전쟁이 북한에 유리하게 전개되던 한국전쟁 초기, 마오쩌둥은 미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파병하겠다는 스탈린과의 약속을 뒤로 하고, 조기 파병을 적극 희망하였지만, 스탈린의 반대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국의 출병 결심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출병을 보류하고 이를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통보하기까지 하였다. 1950년 10월 5일, 중국은 안보위협과 스탈린의 압력을 내세워 출병을 결정하였으나, 스탈린이 즉각적인 공중엄호 및 무기제공에 난색을 표하자 10월 12일에 참전불가를 다시 결정하고 이를 스탈린에게 통보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즉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