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군사]
...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서울 점령 이후 북한군은 단기간 내 남한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3개 축선으로 남진을 전개했다.
p.86
미국은 즉시 일본에 주둔한 지상·해·공군 부대의 한국 파병을 결정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와 함께 16개국이 전투 부대를, 5개국이 의료 및 후방 지원 부대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미국과 유엔의 신속한 대응은 패전 직전의 대한민국을 기사회생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p.110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월 전쟁 발발 직전까지 한반도 전역에서는 38선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사회/문화]
...목청껏 외쳤다. 또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선창으로 나왔다. 역시 청중들은 두 팔을 번쩍 위로 쳐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따라 외쳤다.
이렇게 만세 소리에는 ‘조선 독립 만세’와 ‘대한 독립 만세’가 섞여 있었다. 때로는 한목소리로, 때로는 뒤섞인 채로 해방의 기쁨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런데 3·1운동 때도 그랬고, 광복의 순간에도 우리는 만세를 부를 때 ‘조선’과 ‘대한’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는 흔히 일제에 강제 병합된 나라가 ‘조선’이라고...
[사회/문화]
...주변 지역이 평양시 형제산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그 전까지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평안남도 순안지구의 한구석이었다.
우인희는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개성으로 자리를 옮겨 작은 여관업을 시작하면서 개성사람이 됐다.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남쪽 행정구역이었다. 그 지역이 판문점으로 되면서 북쪽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그는 남쪽 출신으로 기록이 남는다. 출신 지역을 정치적으로 분류하기에 북쪽 출신인가 남쪽 출신인가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의 어머니는 해방 전 서울에서 연극배우로 명성이 있던 황철과는 알고 지내던 사이었다. 전쟁이 끝나 황철이 개성으로 내려가 중학생 우인희를 데려다 국립연극극장 부속예술학교 사무장이던 나웅에게 맡겼다. 처녀애가 제 엄마처럼 넓은 이마에 눈이 크고...
[정치/군사]
...속수무책이었다. 이후 9월 9일, 미군이 서울에 도착해 일본군 항복식을 열며 남쪽에는 성조기가 걸렸다. 한반도의 운명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길 위에 놓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 북한이 ‘친일 청산’을 완전히 해낸 것은 아니었다. 북한 정권 내부에도 일본군이나 헌병 보조원 출신 인물들이 요직에 올랐다. 홍명희, 김달삼, 김영주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과거는 문제 삼지 않았고, 오히려 친일파 논쟁은 남한에 집중되었다. 북한은 소련의 막대한 지원금을 경제 발전이 아닌 김일성 우상화에 쏟아부었다. 전국 곳곳에 김일성 연구실과 기념물이 설치되었고, 관리 비용만 전체 예산의 40%를 차지했다.
해방된 한반도에서 소련식...
[정치/군사]
...style="color:#80888a">작품 속 지원군의 전투 의지는 애국심과 국제주의 정신으로 촉발되며, 이는 대개 신중국에 대한 만족감에서 시작해, 전쟁 발발로 인한 국내 반혁명 세력의 재등장에 대한 우려, 그리고 항미원조 투쟁과 보가위국의 필요성으로 이어지는 서사 구조를 따른다. 따라서 작품 도입부에서는 대다수가 해방된 농민 출신인 지원군들이 건국 이후 ‘새로운’ 중국에서 누리게 된 삶의 변화를 강조한다. 내 땅과 집을 가지게 되었으며, 가난 때문에 지주에게 팔려갔던 동생이 학교에 다니고 공장에서 일하게 되는 등 구중국과는 확연히 달라진 삶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국경 너머 조선이 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참혹하게...
[학술논문] 월북예술인 김태진과 발굴희곡 <임진왜란>(1946) 고찰
본 연구는 해방기에 공연된 김태진의 <임진왜란>(1946) 공연 대본 발굴에서 비롯되었다. 연구목적은 일차적으로 1946년에 공연된 <임진왜란>의 작품 분석과 해방기 역사극 규명에 있다. 동시에 이 작품을 계기로 그동안 한국 근대희곡사에서 거의 연구되지 않았던 예술인 ‘김태진’(1903~1949)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김태진은 식민지 시대 영화계와 연극계에서 배우, 감독, 극작가, 연출가로 활약한 전방위적인 예술가였다. 초기 경향파 영화와 카프 연극운동, 대중연극과 일제 말기 국민연극 등에 관여하며 식민지 문화예술인의 굴절된 삶을 살았고, 해방이후 진보적 연극운동을 하다가 47년에 월북했다. 해방 이전 김태진의 사상적 행보와 활동이력은 해방 이후 조선연극동맹(朝鮮演劇同盟)과...
[학술논문]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영화 ‘피와 뼈’․‘디어 평양’․‘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를 중심으로
...하나는 상실된 권리와 책무를 일본에서 회복하는 것이었다. 주권․영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재일코리안의 노력은 전자에서 후자로의 전환, 곧 ‘국민’-단일국가 단일국민론에서 ‘시민’-다국가 시민론으로 그 포맷을 바꾸어갔다.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해방 이후 한 세대가 지난 1970년대 차별반대투쟁과 80년대 지문날인 거부투쟁을 거치면서부터였다. 이글은 특히 두 번째 길, 한국 국적 혹은 북한의 해외공민 자격을 유지하면서도 일본에서도 시민으로서 권리와 책무를 다하면서 살아가는 길, 곧 다국가 시민의 시민권-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에 보다 주목하고 있다. 이는 영화 ‘피와 뼈’, ‘디어 평양’, 그리고 영화 ‘달은...
[학술논문] 도유호와 한흥수: 그들의 행적과 학술 논쟁(1948~1950)
...체코 프라하에서 김일성의 친서를 받았고, 이를 계기로 1948년경에 입북하였다. 도유호와 한흥수는 원시시대, 고고학, 민속학 등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면서 북한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원시사회의 성격, 생산관계, 혈연관계 등을 고찰하는 데 있어, 서로 상반된 주장과 접근 방법을 표명하며 여러 차례 학술 논쟁을 벌였다. 한국 고고학사의 측면에서 판단할 때, 그들의 논쟁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사회주의적 분위기가 고조된 초기 북한 고고학계의 학문적인 동향을 반영해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그들의 논쟁과 거기에서 논의된 주제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시간적 공간에서 이루어진 한국 고고학사의 빈틈을 채워주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학술논문] 연변 지역의 귀국화교사회와 북한화교사회의 상관관계 및 역사성
...이주・정착하면서 형성된 조선족사회로 주목받는 한편, 해외 화교들의 귀국 행렬과 더불어 귀국화교사회가 형성되면서 중국 동북 지역의 유일한 華僑歸鄕 중심지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았다. 특히 연변이라는 지정학적 원인으로 귀국화교사회의 95%가 북한귀국화교라는 특성이 주목된다. 북한화교들이 연변 지역으로 귀국한 시기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이며 귀국 행렬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51년 초이다. 1962년 이후부터는 자녀들의 결혼과 진로 문제 등을 원인으로 화교들의 귀국 행렬이 이어졌다. 1970년대에 이르면 귀국화교인수는 점점 줄어드는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1979년부터 진행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북한화교들의 귀국 열풍을 불러일으켜 또 다시 귀국붐이 일어났다. 연변으로 귀국한 북한화교들은 용정과 도문을 경유하여...
[학술논문] 해방기 남북한 희곡의 젠더정치 연구
본고는 해방기 혹은 조국 건설시기라 간주되는 8.15 이후부터 한국 전쟁 이전까지 남과 북에서 발표된 연극을 고찰한다. 이 같은 접근은 상이한 체제의 특수성을 간과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당대 연극인들은 이념 성향을 막론하고 정치로부터 분리될 수 없었으며 이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공통적으로 민족국가의 건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수 있다. 또한 당시 남북한의 연극은 창작주체가 전환기 연극의 임무를 고민하여 관객을 계몽하고자 했던 결과였고, 여성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젠더정치가 작동되는 양상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체제의 연극은 함께 논의될 수 있으리라 보인다. 본론에서는 남한과 북한체제의 극 모두 건국의 동지와 교정 대상으로 여성 인물을 이분화한다는 점에서 흡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런데 해방기 민족담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