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북, 애니 '고주몽' 50부작 완결…'고구려 정통성' 선전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북한이 50부작 애니메이션 '고주몽'을 완결하면서 고구려사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선전하고 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2016년 첫 전파를 탄 '고주몽'이 올해 2월 마지막 50부까지 제작을 마치고 현재 TV를 통해 방영 중이라고 12일 보도했다.
[뉴스] 김정은, '전승세대' 상봉모임 참석…"계승의 역사는 더 거룩"(종합2보)
북한이 이른바 '전승절'로 부르는 7·27 정전협정 체결 71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렀다.
[정치/군사]
...준비회의 결정에 따라 남북한은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 정식 초대국이 되었으며, 곧바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아시아·아프리카 경제회의의 초청장도 받았다. 이로써 남북한은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한 이후 10년 만에 다시 제네바에서 마주 앉았다.
1960년대 초중반 아프리카 국가들의 급증은 아시아·아프리카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제3세계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으나, 동시에 증대하는 숫자만큼 국가들의 충돌도 증대했다. 또한 그동안 중립·비동맹을 이끌어온 주역들이 사망하거나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는 일이 발생했다. 특히 제3차 비동맹 정상회의가 1960년대 내내 열리지 못하면서, 비동맹회의는 국제정치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동시에...
[사회/문화]
...어디서 와서 어떻게 우리 국호가 되었는지는 충분히 살펴보았으니, 이제 그 의미를 알아보자.
_(179p) 제2부 ‘대한’의 뿌리를 찾아서, 12장 ‘한’에 담긴 정체성
그렇다면 통일 한반도의 국호는 어떻게 정해야 할까. 국호는 그 나라의 역사가 쌓아온 정체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국호만 보고도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그래서 우리의 통일 국호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상징되는 분단 현대사는 물론이거니와, 단군조선부터 대한제국에 이르는 역사를 아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그런 이름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회/문화]
...것은 1962년 3월이었다. 그녀는 국립연극극장 총장이며 연출가 겸 예술학교 교장이던 황철이 개성에서 데려왔다. 어머니가 딸을 만나려 평양에 오면 내려가는 열차표를 구하기 어려웠다. 전쟁이 끝나기는 했어도 사회생활 전반이 어수선하던 때라 열차표는 암표상들이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평양역은 당시 환경에서는 엄청 큰 건물이었다. 누가 찾아왔다기에 역사 밖으로 나가니 키가 훤칠한 여인이 손편지를 준다. 받아보니 중학교 동창이 부탁하는 소개로 우인희라고 적혀 있었다. 목수건으로 얼굴을 높이 가려 알아볼 수 없었다. 수건을 벗는다. 영화 〈춘향전〉의 우인희였다. 화장을 진하게 하지 않았어도 첫인상이 어딘가 은근히 우아했고 느슨히 웃어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서울, 나는 전라남도 순천, 같은 남쪽 출신이라는...
[사회/문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전 세계 실향민들과의 연대를 도모하고 미래 세대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말합니다. 가족애와 전통 사상을 통한 이념 갈등 극복, 홍익인간 정신과 현대적 가치의 연결, 해외 실향민 박물관 사례를 분석하며 실향민의 생생한 경험과 역사적 기록을 담는 지속 가능한 기념관 운영 방안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실향민 2세대 이후의 세대가 가져야 할 시대적 소명의식과 실천 방안을 저자와 같은 기성세대들이 이끌어줘야 하며, 저자는 이에 대한 실천적 방안들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화경모공원은 실향민의 망향의 한과 분단의 비극을 세계에 알리는 특별한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 등재가 그 의미를...
[정치/군사]
...남한에서는 박헌영이 ‘8월 테제’를 발표하며 인민공화국 수립을 외쳤다. 문서의 마지막 구호는 “스탈린 동무 만세”였다. 반면,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직감하고 대중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유의 유머와 통찰로 혼란스러운 민심을 잡아갔고, 역사 속 예외적인 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 무렵 북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고, 토지개혁이 단행되었다. 무상몰수·무상분배라는 이름 아래 지주들은 하루아침에 땅을 빼앗겼고, 많은 이들이 학살당하거나 추방되었다. 이 시기부터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남과 북의 분단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학술논문] 樂浪郡의 종이제작과 製紙所
...낙랑토성에 제지소 설치와 그에 수반하는 제지술은 한의 군현 지배 과정에서 전해진 것으로 파악된다. 낙랑군과 같은 시기에 군현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의 경우도 2세기 후반경에 중국의 종이와 제지술이 보급되어 제지 수공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한군현 중에 麻・竹・楮 등 종이 원료인 수피를 수급할 수 있는 남방 지역을 중심으로 제지소가 설치되어 군현 지배에 필요한 종이를 충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영세한 보고문에 추측을 거듭하여 얻은 결과지만, 종전에 알지 못했던 종이 제작과 관련된 몇몇 사실들에 접근해 볼 수 있었다. 종이가 가지는 고고학적・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종이 유물의 발견, 제지소 또는 제지시설에 대한 고고학 발굴 조사는 다른 어떤 유적・유구보다도 중요성이 높다. 이에 본고가 야외고고학...
[학술논문] 북한 체제형성기 농업수리화 정책에 관한 고찰
본 연구는 해방후부터 1950년대까지 북한의 농업수리화 정책에 대한 성과와 한계를 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있다. 북한은 체제형성초기부터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고 사회주의체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조치로 농업정책에 집중했다. 북한은 사회계층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빈농, 소농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1946년 2월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등 체제형성 초기 안정화를 짧은 기간에 확보해 나갔다. 북한의 체제형성초기 농업정책은 기본적으로 수리화를 통해 농업생산량 끌어올리는 데 집중되었다. 해방후 북한지역의 열악한 수리시설은 식량 증산에 걸림돌이었다는 점에서 농업수리화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북한은 당시 농업수리화 대표적인 사업인 수리안전답(수리시설에 의해...
[학술논문] 북한 통신대학의 역사: 회귀의 반복과 이중적 통치성
...달리 반복적으로 ‘현지학습반’ 체제로 회귀하는 양태를 보인다. 기술-사회 적정성이 낮은 맥락에서 통신대학이 보이는 회귀는 제도 실패의 결과라기보다, 통치력 유지를 위한 전략적 조정으로 기능하는 측면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또 다른 권위주의 체제인 중국과 비교했을 때 북한의 통신대학은 통치성의 이중구도가 매우 확연하게 드러났으며, 자율적 주체에 대한 논의는 매우 소략한 반면 노동자-학생 통제가 노골적으로 강조되는 양상이다. 이처럼 통신대학의 외피는 학습자 자율에 주목하는 근대 교육제도지만, 그 내피는 통치력 유지를 위한 기술로서 지난한 역사를 구성해왔다. 코로나 이후 등장한 2차 회귀 현상은, 향후 통신대학(원격대학)이 자율성보다 타율성을 강화하는 전통적 방식을 고수할 것임을 보여준다.
[학술논문] 통일을 위한 역사교육 VS. 역사를 통한 통일교육
...방식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4대 국정기조로 설정한 것은 마침내 통일 우선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21세기 G2 시대에서 한반도는 다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남북분단 상태에 있다. 지금 한국인들은 통일을 통해 대륙과 해양의 두 문명의 가교를 넘어 허브가 되느냐, 아니면 다시 두 세력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는 역사를 반복하느냐,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복잡하고 애매한 현실에서 답은 보이지 않는다. 역사에서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서 새 역사를 창조할 때, 우리는 한반도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한 통일교육은 이처럼 분단이라는 한반도 문제를 국민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풀 수 있는 역사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학술논문] 한국에서 일본의 강제동원에 대한 연구 현황과 방향
...영역으로부터 학문의 영역으로 옮겨올 필요가 있다. 필자도 참여한 동남아시아 학자들과의 두 차례 국제회의 곧, 2014년 7월과 11월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학술회의는 매우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더구나 한국 자체만의 연구 인력이 적고, 관련 자료도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고려할 때, 체계적인 접근만 할 수 있다면 이러한 국제회의는 매우 선택적인 노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을 포함한 강제동원 연구의 국제협력과 한국 역사학계의 노력은 우리의 현재적 처지 및 미래지향과 밀접히 연관짖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 더구나 강제동원사 연구는 반성하지 않고 제2의 가해를 일삼고 있는 일본을 코너로 몰기 위해, 문제를 폭로하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다. 일본의 변화도 동반할 수 있는 노력이어야 한다. 한반도는...